“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13일(한국시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서부에 있는 피어젠연회홀에 애국가가 쩌렁하게 울려퍼졌다. 시상대 가장 높은 자리에 선 한국 3쿠션 국가대표 최성원(39·부산시체육회) 김재근(44·인천연맹)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애국가를 크게 따라불렀다. 

한국 당구 100년사 새 이정표가 피어젠 땅에서 쓰여졌다. 한국 3쿠션 대표팀이 세계팀선수권대회 출범 36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국내랭킹 1, 2위인 최성원 김재근이 호흡을 맞춘 한국대표팀은 이날 막을내린 제31회 3쿠션 세계팀선수권 결승에서 세계캐롬당구연맹(UMB) 랭킹 1위인 벨기에(프레드릭 쿠드롱, 롤란드 포톰)를 40-34(24이닝)로 꺾었다. 이전까지 한국이 이 대회에서 거둔 최고 성적은 2년 전 같은 장소에서 열린 29회 대회에서 조재호(서울시청) 허정한(경남연맹) 조가 거둔 준우승이다. 당시에도 결승에서 벨기에를 상대했는데 ‘원투펀치’로 불리는 쿠드롱, 에디 먹스와 겨뤄 1-1로 비긴 뒤 스카치 더블(두 명의 선수가 번갈아 타석에 들어서는 2인1조 복식 경기)로 치러진 연장전에서 아쉽게 패했다. 이번에도 벨기에엔 세계랭킹 2위(2월 기준)인 쿠드롱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번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2년 만에 리턴매치 기회에서 설욕에 성공, 지난 2012~2015년 4회 연속 정상에 선 뒤 통산 5번째 우승에 도전한 벨기에의 아성을 잠재웠다.

세계팀선수권은 1981년 멕시코시티에서 초대 대회가 열린 이후 1987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3회 대회까지 최소 2년에서 4년 주기로 열렸다. 그러다가 1990년 4회 대회서부터 독일 피어젠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다. 하지만 우승 팀은 전통의 당구 강국에 편중돼 있었다. 스웨덴이 9회로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터키와 벨기에, 독일, 일본이 각각 4회로 뒤를 잇고 있다. 네덜란드(3회) 덴마크(2회) 순이다. 즉, 한국은 세계팀선수권을 제패한 8번째 나라가 됐다. 아시아에선 1992년 피어젠에서 열린 6회 대회 우승을 차지한 일본 이후 25년 만에 우승국을 배출했다. 1970~1980년대 고 이상천 이후 제2 중흥기를 맞은 한국 당구는 최근 월드컵과 세계선수권 개인전 등에서 두각을 보이더니 마침내 UMB 주관 메이저 국가대항전인 팀선수권 제패에 성공했다. 당구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해낸 것도 의미가 크다. 

당구는 개인 성향이 유독 강한 종목이다. 그러나 팀선수권은 아무리 ‘원맨쇼’를 펼친다고 해도 동료가 따라주지 않으면 이기기 어려운 대회다. 더구나 경기 방식도 대회 본질에 맞게 바뀌었다. 지난해까지는 선수간의 일대일 대결을 한 뒤 무승부를 거두면 스카치 더블로 연장을 치렀지만, 이번 대회서부터는 전 경기 스카치 더블로 치러졌다. 어느 때보다 팀워크가 생명이었다. 하지만 종목의 특성상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동료의 실수가 나오거나, 경기 중 의견이 엇갈리면 급격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최성원과 김재근이 사상 첫 우승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서로를 향한 진심어린 배려와 긍정적인 소통 자세를 지속해서 유지했기 때문이다. 최성원은 팀선수권 출전이 이번으로 네 번째다. 지난 2008년과 2010년 고 김경률과 짝을 이뤄 3위를, 2012년엔 조재호와 출전해 5위를 기록했다. 김재근은 지난해 김행직과 피어젠 땅을 밟아 처음으로 팀선수권에 나섰지만 조별리그 탈락의 아픔을 안았다.

둘 다 팀선수권을 앞두고 서로의 기량과 당구 스타일을 존중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설령 경기 중 실수가 나와도 격려하면서 최대한 장점을 발휘하도록 하자는 게 최대 화두였다. 말처럼 쉽지 않을 수 있으나 이들은 해냈다. 이번 대회 최대 고비였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만난 ‘다크호스’ 이집트전이 하이라이트였다. 헝가리와 첫 경기를 가볍게 이겼지만 이상하리만큼 이집트전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샷이 흔들렸다. 하지만 오히려 이때 서로를 다독였다. 이집트에 먼저 40점을 내주면서 탈락 직전까지 갔지만 후구를 잡은 최성원이 초구 포지션에서 득점에 성공, 극적인 무승부를 거뒀다. 이집트와 1승1무 타이를 이뤘지만 전날 에버리지에서 한국(1.600)이 이집트(1.250)보다 앞서면서 조 1위에 주어지는 8강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위기를 이겨낸 한국은 8강 토너먼트서부터 경기력이 부쩍 좋아졌다. 믿음의 힘이 생기다 보니 약속된 포지션 플레이도 한층 향상됐다. 8강과 4강에서 만만치 않은 터키, 프랑스를 가볍게 따돌렸다. 벨기에와 결승에서도 마찬가지다. 초구를 결정하는 뱅킹샷에서 이긴 한국은 5이닝에 하이런 9점으로 이번 대회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9이닝까지 벨기에에 20-18로 앞섰다. 이때까지 평균 에버리지가 2.222일 정도로 샷 감각이 빛났다. 

세계 1위 벨기에가 거세게 추격, 11이닝 21-21 동점을 허용한 뒤 역전, 재역전을 거듭한 한국이나 32-31로 앞선 23이닝 승부처에서 승기를 굳혔다. 김재근과 최성원은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공격적인 샷을 시도, 포지션 플레이를 펼치면서 연속 6점에 성공했다. 반면 벨기에는 포톰이 1점을 추가하는 데 그쳤고, ‘4대 천왕’ 쿠드롱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포톰과 상의한 끝에 샷을 시도했으나 확신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공은 살짝 벗어났다. 한국은 38-32로 앞선 24이닝에 최성원이 빗겨치기를 성공, 뒤돌려치기 포지션을 만든 뒤 김재근이 이어받아 득점에 성공하면서 40점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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