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최강희는 오랫동안 ‘힐링의 아이콘’이었다. 

그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공감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 그에게 ‘사고’처럼 우울증이 찾아왔다. 오랜 어둠의 터널을 지난 뒤 최강희는 ‘세탁기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 것 처럼’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작품 선택의 기준도 달라졌다.

최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카페 북티크에서 진행된 KBS 2 ‘추리의 여왕’ 종영 기념 인터뷰에서 최강희는 담담하게 ‘진짜 최강희’를 이야기 했다.

-‘추리의 여왕’ 종영 소감은. 
종영 다음날 하룻 동안 ‘설옥(주인공 이름)앓이’를 했다. 더이상 대본이 없으니 ‘지금 설옥은 뭘 할까, 잘 있을까’가 궁금하더라. 어느 배우나 드라마 끝나면 캐릭터에 상관 없이 공허함을 느끼긴 하지만 이렇게 내가 출연한 극중 역할에 대한 앓이를 경험한 적은 별로 없었다.

-왜 설옥에 대한 ‘앓이’를 심하게 겪었나.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가만 곱씹어 보니 설옥은 뛰어난 장점을 지녔지만 현실은 우리와 비슷한 인물이었다는 점 떄문인 것 같다. 능력은 충분한데 자기가 되고 싶은 게 못되는 데서 나오는 찌질함. 현실에 있을 것 같은 캐릭터였다. 또 이 드라마는 엔딩이 확실하게 지어지지 않고, 사건도 마음대로 안풀리니, 시간이 계속 흐르는데 나 혼자 빠져나온 느낌이 들었다. 

-드라마는 매니아층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나는 이 드라마가 대중적인 사랑을 받을 줄 알았다. 완전 빵 터지거나 완전히 묻히거나 할 줄 알았지 매니아적인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팬들이 콩깎지 씌인 듯 우리 작품을 사랑해 준 것 같다. 우리를 좋아하기로 마음 먹은 뒤엔 단점도 다 품어주는, 그런 보호받는 사랑을 받은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추리를 별로 안좋아한다. 우리나라에 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면 애초부터 ‘셜록’같은 작품이 나왔겠지만 그렇게 많다고 생각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우리 작품은 추리를 좋아하는 분들도 좋아해주고, 추리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 기존 내 팬층도 함께 좋아해준 작품이 됐다. 둘의 교집합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층위의 팬들이 한배를 탔던 느낌이다.

-기존 최강희의 팬들은 어떤 이들인가. 
시청률이 잘 안나와도 감성, 공감대, 위로, 따뜻함 같은 가치를 좋아하는 내 팬층이 있다. 여태까지 작품을 선택할 때 내가 좋아하는 걸 골라왔다. 

-MBC ‘화려한 유혹’(2015) 같은 작품은 기존 최강희의 작품과 달랐었는데.
원래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선택 기준 대신 다른 기준으로 작품을 고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내게 ‘화려한 유혹’ 대본을 적극 권유하지 않았는데 내가 해보겠다고 해서 회사도 놀랐다. 내가 선택할 취향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도전을 택했었다. 내 기존 팬들은 ‘화려한 유혹’ 때 공감을 못했는데 다행히 우리 엄마가 좋아했다. 주위 아줌마들과 딸 얘기를 많이 나누니 기분 좋아했던 것 같다. 

-‘화려한 유혹’부터 다른 작품 선택시 다른 기준을 세운 이유는.
2012~2013년 우울증을 앓았다. 2014년말께 회복했다. 한번 세탁기에 넣었다 나온 듯 내 자신이 바뀌었다. 무엇도 무서워하지 않는 용기를 갖고, 내려 놓고 고른 작품이 화려한 유혹이었다. 50부작의 세계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고 싶었다. 내가 되게 잘할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고통과 진통도 있었다. 그러나 나락으로 떨어진게 아니라 아픔을 잘 겪고 넘어갔다. ‘추리의 여왕’도 이전 내 선택 기준과는 다르게 고른 작품이다. 

-추리 장르를 개인적으로 안좋아한다면 ‘추리의 여왕’은 어떤 선택 기준으로 골랐나.
라디오 ‘야간비행’을 하며 만난 한가람 작가를 위한 드라마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친한 친구다. 그 친구가 추리를 좋아한다. 한가람이 굉장히 만족해한 작품이었다. 나는 사실 수학적 사고가 약하고, 복잡한 관계가 나오면 힘들다. ‘화려한 유혹’도 그래서 힘들었다. 개연성이 이해되지 않으면 연기를 못하는데, 이번 작품은 대본이 나오면 한가람에게 보냈다. 그러면 자녀가 잘 때 숙제를 해주는 엄마처럼 한가람이 씬과 사건을 정리해서, 설명해주고 코멘트를 줬다. 그럼 이해가 쉬웠다. 한가람 때문에 한 작품이지만 그를 대중의 한명, 시청자라고 생각하며 만족시키려 한 측면도 있다.

-최강희는 밝은 ‘힐링 아이콘’인데 우울증을 겪은 이유는. 
‘왜’가 없더라. 사고처럼 일어났다. 지나고 나서 왜 였는지 돌아봤다. 남들에게 위로를 줘왔는데 공급받는 게 없이 내 안의 것을 보여주려다 보니, 내게 기쁨이 없는데 남에게 기쁨을 주려하고 내게 위로할 힘이 없는데 다 꺼내서 연기하려다 보니, 고갈 상태가 되고 내 낮은 자존감이 드러난 거다.

연예인을 오래 했다. 악플이나 나쁜 평가를 많이 받는 편은 아니지만 나에 대한 기대치, 좋은 수식어가 붙는 게 부담이 됐다. 좋은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실제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밝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 보니 아니네요’하는 말을 들으니 자꾸 활동을 안할 땐 숨고 싶었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많이 하는데 내 실체를 알면 사람들이 실망할 것 같았다. 

안 좋은 말을 받아들이고, 좋은 말을 안 받아들이게 되더라. 그러다 보니 일을 안할 땐 바깥에 못나왔고 집에 주로 있었다. 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내일이 오는 게 싫었다. 종교가 이런 증상을 이겨내는 데 큰 힘이 됐다. 

-우울증을 겪은 뒤 달라진 점은. 
나는 얼떨결에 연예인이 됐고,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면서 내가 팬을 좋아하게 됐다. 다른 연예인과 다를 수 있는데 팬들에 대해 잘 알았다. 팬들을 좋아하게 됐고 그들이 내게 좋아하는 걸 만족시키고 싶었다. 팬들에게 집중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자 하는게 아니라 내 연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좋게 해주고 싶었다. 거기 메여있었던 것 같다. 

연기 하고 싶지도 않고, 용기도 없고, 꿈도 사라진 시기도 있었다. 우울증에서 회복된 뒤에도 내가 다음 작품을 선택하지 않고 있더라. 그런데 월드비전 홍보대사로 우간다에 다녀오고 하며 마음이 회복됐다. 김혜자 선생님이 내게 영상 편지를 줬는데 ‘최강희씨 팬이에요.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훌륭한 배우가 되세요. 더 훌륭한 배우가 되세요. 그래야 주목받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돼요’라고 해주셨다. 갑자기 마음에 불이 켜지는 느낌이 들면서 다시 연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 이후 고른게 이번 ‘추리의 여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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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플라이업 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