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수첩]

남상욱 기자/취재부


 한국 문화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 전에 자신을 둘러본 후 조신하게 행동하라는 뜻으로 쓰인다.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한국인 습성을 고려하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곧 겸손과 순종의 태도에 다름아니다. 결국 가만히 있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미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재난이 발생하는 상황에선 더 이상 미덕이 아닌 듯 싶다. 

 미국에서 4번째로 큰 도시 휴스턴이 지금 물난리로 큰 피해를 입고 있다. 허리케인 하비의 물폭탄이 휴스턴에 1년 동안 올 비를 단 며칠 사이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휴스턴 시장인 실베스터 터너는 정치 인생 28년 중 가장 힘든 결정을 놓고 고민했다. 예고된 재난을 앞두고 휴스턴 시민 230만명에게 대피령을 내려야 할지를 놓고 고심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가만히 있으라'였다. 

 터너의 '가만 있으라'결정에 그레그 에벗 텍사스 주지사는 거세게 반발했다. 곧 닥칠 홍수가 얼마나 엄청날지 모르기 때문에 대피령이 없어도 대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터너 시장은 "솔직히 말해서 집을 떠나 거리로 나오면 더 위험질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터너가 집을 나오면 더 위험하다고 한 것은 2005년 허리케인 리타 사태의 기억 때문이다. 당시 당국이 대피령을 내리자 200여만명이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시민들이 폭염 속 뒤엉킨 자동차 행렬에 갇혀 100여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일어났다. 

  2014년 국립기상청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익사자 66%가 운전 중에 사고를 당한 경우다. 물이 불어날 때 가장 위험한 장소는 집 안이 아니라 차 안인 셈이다.

 실제 지금까지 하비에 희생된 사람은 40여명. 역대 다른 허리케인에 비해 인명피해는 매우 적은 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지난 6월 영국 런던에서 발생한 고층 아파트 화재로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열악한 화재 안전 환경이 인명 피해의 큰 이유지만 불이 나면 집에 들어가 가만히 있으라는 대피 매뉴얼도 인명 피해에 한몫 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가만히 있으라'역시 슬프고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지난 2014년 한국의 세월호 침몰 당시 "배안에 가만히 있으라"라는 선장의 안내 방송을 믿고 따른 학생과 승객 중 304명이 희생됐다. 

 재난은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결핍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 모순과 결핍에서 교훈을 얻어 재난을 방지하기 위한 많은 대안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결국 재난을 통해 발전이 있게 된다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만 듣고 가만히 있다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는다면 누구를 원망할까. 그래서 어디서든 '리더'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