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열두 마리가 소풍을 갔다. 개울을 건너게 되자 혹시나 물에 빠진 녀석은 없는지 보려고 대장 돼지가 점검을 한다. "하나 둘... 어? 열한 마리밖에 안 되네. 한 마리가 부족하다" 다른 돼지가 나와 다시 세어 봐도 역시 열 한 마리뿐이다. 자신을 빼고 세었기 때문이란 걸 알 리 없는 돼지들. 계속 세었지만 마찬가지. 이 때 좀 똑똑한 돼지가 나와서 "대장 돼지를 안 세었으니까 그렇지"하고는 '대장부터 하나'하면서 세어 나간다. 그래도 역시 열 한 마리뿐이다. 자기를 또 빼먹은 것이다. 아까부터 가만히 있던 그나마 제일 영리하다는 돼지가 나섰다. "대장과 너를 안 세었으니 그렇지. 그러니 둘을 미리 빼고 나면 열 마리가 되겠지? 하고는 다시 세었는데, 어라? 열한 마리다. 오히려 한 마리가 더 있으니 없어진 게 아니고 아무래도 여우가 변장하고 우리를 잡아먹으러 끼어든 게 아닐까? 그것부터 잡아야겠다"면서 해가 저물도록 엉뚱한 일로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 삶 속에서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한 학생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생리적인 현상이 일어나려고 했다. 때마침 차안의 라디오 음악에서 베토벤의 운명이 '빠바바 방-'하고 힘차게 들려왔다. '때는 이때다'싶어 힘차게 실례를 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으리라 했는데 모든 이가 찡그린 얼굴로 자기를 쳐다보더란다. 웬일인가 싶어 보았더니 '아차!'들려 온 음악은 자기머리에 낀 헤드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거야 그냥 웃어버리면 끝나는 일. 그러나 불리한 상황이 되면 나만은 예외라고 빼고 모든 피해를 남에게 떠넘기는 행위나 그것도 모자라 남을 헐뜯고 중상모략까지 하는 비행들이 우리를 암울하게 한다. 그럼에도 슬퍼하지 말자. 반대로 우리 이웃 중에는 남을 위해 자신의 몫을 빼는 이들이 아직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기희생 정신으로 남에게 이로움을 주려는 숭고함이 그나마 병든 사회를 치유하며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민간설화에 보면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주인이 물었다. 그러자 돼지는 개나 소, 닭 등은 주인을 위해 하나같이 좋은 일을 했지만 자기는 밥만 축내고 놀기만 한 게 미안해서 "저는 주인을 위해 한일이 없으니 앞으로 주인을 위해 제 목숨을 바쳐 제물이 되겠습니다"했더란다. 그래서 돼지는 재산이나 복을 주는 집안의 재신(財神)으로 상징이 되었다는데 그러고 보면 돼지를 한자로 돈(豚)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말로 현금을 '돈'이라고 발음하는 것과 같은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어디 그것뿐인가? 돼지는 신통력을 가진 동물이어서 신에게 바치는 희생양으로 고사상 위에도 그 머리를 제일 먼저 올리고 두 손 모아 빈다. 그리곤 돼지를 '도야지'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어쩌면 '…되야지'하는 소망과 '…되지'하는 믿음과도 연결고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돼지는 나만이 아닌 공동의 선을 이루어 감을 가르쳐 주고 풍요와 다산을 쌓아갈 수 있게 도와주며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는 멘토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경찰이 사람 대신 돼지를 차에 태워 호수에 수장하는 실험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돼지는 사람 피부와 비슷해서 물속에서 부패하는 과정을 알아내 미해결로 남는 많은 익사 사고나 사건을 조사하는 데 필요한 과학수사기법을 개발하기 위해서란다. 이제 돼지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도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