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박영규·정보석·조재현·김영철·김응수 등 
명불허전 연기로 주인공 제치며 충만한 포만감 선사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또다시 매력적인 악당의 출현이다.

누가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악당도 시청자의 돌팔매질이 아니라 사랑을 한몸에 받을 수 있음을 '임진왜란 1592'의 김응수가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였다.

드라마 속 악당의 역할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면서 주인공의 성공담을 더욱 극적으로 포장하는 데 있지만, 때로는 악당을 맡은 배우의 열연과 캐릭터 해석 능력이 너무 멋져 악당이 주인공을 제치고 시청자에게 충만한 포만감을 안겨주고는 한다.

최근 몇 년간 시청자의 큰 사랑을 받았던 매력적인 악당에는 누가 있었을까.

◇ '미실' 고현정·'조필연' 정보석

2009년 MBC TV '선덕여왕'에서 팜므파탈의 매력적인 권력자 미실을 연기한 고현정은 그해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선덕여왕이지만, 방송 내내 스포트라이트는 선덕여왕의 반대편에 섰던 '악녀' 미실이 받더니 결국 연기대상마저 차지했다.

야망에 휩싸인 섹시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고현정의 미실 연기는 시청자의 혼을 쏙 빼놓았고, 그가 주인공 덕만(선덕여왕의 즉위 전 이름)을 위협하는 존재임에도 그에 대한 응원이 이어졌다.

당시 '선덕여왕'의 제작발표회 때 고현정은 "주인공 쪽으로 시선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애를 쓸 것이다. 이요원에게 도전하는 고현정의 처절한 모습을 보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실의 인간적인 매력을 극대화한 '고현정의 처절한 모습'은 시청자에게 근사한 일품요리를 맛보는 듯한 기쁨을 안겨줬다. 시청률도 미실의 죽음을 앞두고 44.9%(닐슨코리아)까지 치솟았다.

2010년 SBS TV '자이언트'에서는 정보석이 연기한 불사조 같은 악당 조필연이 극에 힘 좋은 동력으로 작용했다.

1970-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자이언트'에서 조필연은 중앙정보부 과장 시절 강남 개발을 배후 지휘하며 기업으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고, 정계에 진출해 승승장구하는 인물.

명석한 두뇌, 안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탱크 같은 추진력으로 돌진하는 조필연은 주인공 이강모에게 있어서는 평생에 걸친 철천지원수로, 사사건건 이강모를 위협하고 방해한다.

하지만 좌고우면하지 않는, 스피드 스케이팅 같은 정보석의 '검은 질주'는 시청자를 짜릿하게 만들었고, 60부작인 이 긴 시대극이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게 만들었다.

덕분에 시청률도 고공행진하다 마지막회에서 40.1%(TNMS)를 기록했다.

당시 정보석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남들에게는 나쁜 놈이지만 연기하는 제가 악당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하면 우스워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도 젊었을 때는 악역을 맡으면 악당이라 생각하고 연기했지만, 그러면 편협한 인물을 그리게 되고 그 인물의 삶은 보여주지 못한다. 나이 먹으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고 악역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 '수양대군' 김영철·'이인임' 박영규

2011년 KBS 2TV '공주의 남자'가 인기를 끈 데는 수양대군을 연기한 김영철의 존재감이 큰 역할을 했다.

왕권에 대한 야망으로 피바람을 불러일으키지만 겉으로는 늘 온화한 표정을 짓는 수양대군의 모습은 시청자를 쥐락펴락했다.

'공주의 남자'는 수양의 장녀와 김종서의 아들이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팩션 사극으로, 당연히 수양은 악역이다. 하지만 김영철이 수양의 복잡하고 기막힌 심경을 능수능란하게 그려낸 덕에 수양은 입체적인 인물이 됐다.

당시 김영철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가장 좋은 승리 아니냐"며 "수양은 웃으면서 시청자가 그런 수양을 무서워하게 만들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해야겠나"는 말로 역할이 만만치 않음을 시사했다.

"수양의 아픔, 뒷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던 김영철이 끝까지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드라마는 자체 최고인 24.9%의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2014년 중년 이상의 남성들을 TV 앞으로 끌어모은 KBS 1TV '정도전'에서도 주인공 정도전보다 고려말 권문세족 이인임이 화제를 모았다.

박영규가 연기한 이인임은 기품이 흘러넘치면서도 이기적인 야망으로 이글이글 대는 거대 악당의 모습으로 시청자를 홀렸다.

정치 9단에 꼬리가 9개 달린 여우이면서도 왕을 위협하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무장한 박영규의 이인임은 '정도전'의 주옥같은 대사와 함께 매회 큰 반향을 낳았다.

드라마 시작에 앞서 "허술한 악역이 아닌 만큼 어깨가 무겁다"고 강한 의욕을 보였던 박영규는 드라마를 끝낸 후 "제 안의 구석에 차 있던 연기의 한을 풀었다. 그간 보여주지 못한 걸 다 쏟아부어 여한이 없다"는 말로 만족감을 드러냈다.

당시 길에서 박영규를 발견한 한 청년이 반색하며 뛰어와 "정말 이인임과 똑같이 생겼다"며 인사한 게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남았다.

박영규는 그 젊은이에게 "이인임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냐"고 물었더니, 청년은 "모른다. 그런데 박영규씨처럼 생겼을 것 같다"고 답했다.

역대 사극에서는 비중 있게 조명되지 않았던 이인임 캐릭터가 박영규의 명연기와 함께 강력한 생명력을 얻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런 이인임의 활약에 '정도전'은 추락해가던 대하사극의 시청률을 반등시키는 공적을 세웠다. 마지막회에서 최고 19%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 '이태준' 조재현·'도요토미 히데요시' 김응수

2015년 SBS TV '펀치'에서 조재현은 이태준이라는 불세출(?)의 비리 검사를 탄생시켰다.

자신의 입신양명, 가족의 안위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이태준의 독이 잔뜩 오른 맹견 같은 활약상은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조재현은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포장한 구수한 분위기로 상대를 무장해제시킨 뒤 뱀 같은 권모술수를 끊임없이 구사하는 이태준의 뻔뻔하고 사악한 모습을 참으로 맛있게 표현했다.

다른 직업도 아닌 검사이자, 검찰총장에 오르는 인물이기에 악당 이태준의 일거수일투족은 뒷목을 잡게 했다. 하지만 조재현은 단순한 비리 검사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이태준을 그리는 데 성공하며 묘한 연민을 자아냈다.

당시 조재현은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듯, 이태준 역시 그 자리에 올라서기까지는 정도가 아닌 길을 밟기도 했다"며 "이태준을 연기하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이해되고 연민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소개했다.

2016년 가을에는 KBS 1TV 팩추얼사극 '임진왜란 1592'의 김응수가 그야말로 '히트다 히트'.

앞선 작품들이 대개 50~60부작이고, 가장 짧은 '펀치'도 19부작이었던 것과 달리 '임진왜란 1592'는 5부작의 단출한 구성이고 그나마도 3회까지밖에 방송되지 않았다.

그런데 첫회가 나가자마자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연기한 김응수의 연기가 '대박'을 쳤다. 추석 연휴 재방송된 1~3회도 시청률이 6~8%를 기록하며 관심을 모은 것은 김응수의 연기에 대한 입소문이 퍼진 덕분이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다큐 형식의 극사실 드라마인 데다, 민족의 영웅 이순신보다 적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진 듯한 인상마저 주는 '임진왜란 1592'가 이같은 반향을 얻을 것이라고는 KBS조차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김응수의 신들린 듯한 연기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게 불꽃을 활활 지피면서 사료에 충실하게 만든 '임진왜란 1592'의 자체 완성도도 주목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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