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커스]

한국 입양아 출신 해외 고위 공직자 줄이어
버려지 듯 고국떠나 낯선 땅에서 이룬 성공 
마음의 상처, 좌절도…못막은 '필연의 인생'


인생은 필연과 우연이라는 씨줄과 날줄이 엮여서 만들어지는 이야기. 전쟁과 가난 때문에 부모의 품을 떠나 낯선 곳으로 보내져야 했던 해외 입양아들의 운명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버려지듯 고국을 떠난 그들.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고 자라야 했지만 온갖 좌절을 딛고 끝내 '필연의 인생'을 그려낸 그들과 그들의 험난했던 삶을 향해 우리 모두 외쳐본다. "장하다" 

성경책·옷 몇벌 들고…
 ▶장 뱅상 플라세(한국명 권오복·프랑스 국가개혁 장관)

  장 뱅상 플라세(Jean Vincent Place)는 한국에서 태어나 1975년 일곱 살 때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계 프랑스인이다. 

 현재 그의 직함은 프랑스 국가개혁 담당 장관이다. 2010년 녹색당 사무부총장을 거쳐 이듬해 한국인 입양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그의 출생연도는 1968년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경기도 수원의 한 보육원에서 생활하던 그는 7살 때 성경책과 옷 몇 벌을 가지고 프랑스 행 비행기를 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버린 한국에 냉담한 감정을 품었다는 플라세 의원은 2013년 딸이 태어난 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방문도 고려 중이다.

40년만에 첫 한국 방문
 ▶플뢰르 펠르랭(한국명 김종숙·前 프랑스 디지털 경제장관)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은 한국계 입양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장관에 오른 인물이다. 2012년 프랑스 대선 때 올랑드 캠프에서 디지털 선거운동을 지휘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소기업·디지털 경제 장관에 임명됐다.

 1973년 생후 6개월만에 프랑스에 입양된 그녀는 교육을 못 받은 양어머니의 한(恨)을 대신 풀려고 억척스레 공부해 최고 엘리트만 가는 국립행정학교(ENA)를 나와 감사원에서 일했다.

 2013년 3월 입양 후 처음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현재 장관직에서 물러나 한국 기업의 프랑스 투자를 돕는 기업 '코렐리아'를 설립했다.

골목길에 버려졌지만…
 ▶조아킴 송 포르제(한국명 손재덕·프랑스 하원의원)

지난 18일 치러진 프랑스 총선 결선 투표에서 스위스·리히텐슈타인 지역구에 출마한 조아킴 송 포르제가 74.8%의 득표율을 기록해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포르제는 생후 3개월 때인 1983년 7월 서울의 한 골목길에서 경찰에게 발견됐다. 옷에는 생일이 '4월15일'이라고 적힌 쪽지만 들어 있었다. 이후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작은 도시 랑그르의 한 가정에 입양됐다.

 포르제는 어렸을 때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집에서 공부를 했다. 과학과 음악에 재능을 보인 그는 파리고등사범학교를 거쳐, 2008년 스위스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는 개인 블로그에 자신의 한국 이름을 '손재덕'이라고 소개했고, 한복을 입은 사진을 올려놓기도 했다. 
 
봄에 태어나'김진달래'
▶예시카 폴피에르(한국명 김진달래·스웨덴 3선 국회의원)

 예시카 폴피에르(Jessica Polfjard)는 스웨덴 온건당 국회의원이다. 18세부터 온건당 청년 조직에서 정치를 배우기 시작해 20세에 시의회 의원이 됐고 35세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의 한국이름은 '김진달래'. 보육원에서 봄에 태어났다고 붙여준 이름이다. 1971년 서울의 한 경찰서 앞에서 버려진 채 발견돼 보육원에 맡겨졌다가 이듬해 스웨덴으로 입양됐다. 

 인구 15만명의 작은 도시인 베스테로스주에서 자란 그는 "당시엔 스웨덴에 이민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같이 입양된 여동생과 나는 당연히 눈에 띄는 존재였다"고 했다.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답할 때마다 불편함은 느꼈지만 성공의 씨앗이 됐다. 

서울역에서 거지생활
▶폴 신(한국명 신호범·前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

 19세 때 입양된 폴 신(Paull Shin) 전 상원의원은 2014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1936년 경기 파주시 금촌에서 태어나 4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6세에 가출해 서울역 인근에서 거지 생활을 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들에게 "초콜릿 좀 달라"고 쫓아가다가 트럭에 올라탄 뒤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됐다. 그의 성실한 태도를 눈여겨본 미 군의관 레이 폴 박사가 열아홉의 그를 입양해 1955년 미국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독학으로 중·고교 과정을 마친 후 브리검영 대학을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석사 학위를, 1974년엔 워싱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 정계에 입문한 그는  미국 내 한인 권익 보호를 위해 많은 활동을 해왔다. 신 전 의원은 2003년 '미국 최고 해외 이민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