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천국’, 울릉도는 내겐 천국 같은 곳이다.”

아름다운 신비의 섬 울릉도에 이장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수로 복귀한 이장희가 공연을 시작했다. 울릉군 북면 현포리에 ‘울릉천국 아트센터’를 개관, 지난 8일(이하 한국시간)을 시작으로 세 번째 무대에 오른 이장희는 “70세가 돼서 음악을 다시 하는 게 기쁘고 좋고 설레기도 하다”고 웃었다.

이장희는 15일 오후 5시 ‘울릉천국 아트센터’에서 프레스투어 무대를 펼쳤다. 5월 8일 개관일부터 9월 15일까지 화, 목, 토 주3회 상설 공연을 개최하며 송창식, 윤형주 등 쎄씨봉 멤버들을 비롯한 다양한 뮤지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공연을 하는 건 은퇴 후 울릉도에 둥지 튼 지 14년 만이다. ‘울릉천국 아트센터’는 이장희가 자신의 농장 ‘울릉천국’과 집 앞 부지 일부를 제공하고 경북도·울릉군이 70억 원을 지원해 지상 4층 규모로 지었다. 무대는 150석을 수용하는 아담한 규모지만 오로지 공연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장희는 “울릉 천국에 오신 여러분들 환영합니다”라며 호쾌한 목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첫 곡은 ‘그 애와 나랑은’. 누구나 품고 있는 ‘첫사랑’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노랫말에 관객들은 첫 무대부터 빠져들었다. 첫 곡을 마친 이장희는 이번 무대를 함께 꾸민 음악 동료이자 친구 기타리스트 강근식과 베이시스트 조원익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40년 만에 친구들과 음악을 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른다. 강근식과는 1996년부터 울릉도에 놀러 오곤 했다. 우연한 기회에 조원식도 울릉도에 놀러 오게 됐고, 이곳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3년간 한 번도 육지로 나가지 않았다. 강근식은 제가 미국을 간 뒤 CM송 작곡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모 제과사의 아이스크림 송과 짜장라면 송이 그의 작품이다. 조원익은 울릉도에 저와 함께 살면서 초,중학교 방과후 음악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섬마을 선생님’이다.”

이어 주옥같은 ‘노래 잊혀진’ ‘사람 편지를’ ‘자정이 훨씬 넘었네’를 열창했다. “1960년대 쎄시봉을 결성했을 때 음악 하는 친구들 많이 만났다. 당시 이상벽이 사회자였는데 어느 날 그가 소개해준다고 데려온 사람이 강근식이었다. 내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강근식한테 보자마자 ‘너 돈 있니, 있으면 자장면 먹으러 가자’고 했다고 한다. 보자마자 이 친구와 통하는 걸 느꼈고 계속 음악 이야기를 했다. 저녁을 먹고도 끝나지 않아 강근석 집에서 잠을 잤고, 다음날도 계속 음악이야기를 했는데 또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잤다. 아침부터 밤까지, 밤을 새워서까지 음악 이야기를 했던 친구다. 이 친구와 놀면서 만든 곡이 ‘자정이 훨씬 넘었네’다.”

이처럼 이장희의 음악은 그의 인생에서 나온다. 친구와 놀 때 곡이 탄생했듯 ‘울릉도는 나의 천국’ 역시 울릉도의 자연경관에 반해 뚝딱 지은 곡이다. “1996년에 울릉도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배를 타고 울릉도에 들어가면서 바위 사이를 지나가는데 마치 천국에 와있는 듯한 신비감을 느꼈다. 그 후 열흘 동안 도보로 울릉도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 반해버렸다. 여기에서 살고 싶은데 당시 부동산이 없어서 농협을 찾아가 신분을 밝혔다. 지금은 미국에 사는데 여기서 은퇴하고 싶다고 했더니 직원분이 북쪽이 비경이라며 추천해줬다. 분지처럼 생기고 양쪽으로 봉우리가 있는 곳이다. 주변엔 코끼리 바위 등 그야말로 비경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그 땅을 샀고 집을 지은 뒤 ‘울릉천국 아트 센터’를 짓기 위해 농장 부지 500여 평을 울릉도에 기증했다. 이곳에 살면서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보낼 때 ‘울릉천국’이라고 썼다. 내겐 천국 같은 곳이다. 울릉도에 정착한 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울릉천국 아트 센터’를 짓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처음 경상북도·울릉군에서 제안받았을 땐 고민했다. 은퇴 후 조용히 살고 싶어 온 곳인데 더덕 농사나 짓고 싶었다. 그런데 소질 없는 더덕 농사를 대신해 가꾸기 시작한 정원이 초등학생 소풍지가 됐다. ‘무릎팍도사’ 등 방송 출연 후엔 관광객까지 많아졌다. 결국 주변에 버스 정류장, 공중화장실을 만들었고 관광지가 됐다. 이렇게 된 거 많은 사람이 만끽하는 공공지가 낫겠다 싶었다”고 설명했다.

뜨거웠던 청춘기를 지나 노래 제목보다 더 세월이 지난 후 부르는 ‘내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는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이 곡은 1974년 고려대학교 신입생회에 초청을 받았을 때 뭘 만들까 고민하다 작사하고 30분 만에 곡을 붙여 만든 곡이다.”

1960년대는 포크송과 함께 팝송의 전성기였다. 팝송 메들리를 준비하며 이장희는 무명시절을 떠올렸다. “강근식을 알게 된 시기에 조영남 형이 가장 먼저 유명해졌다. 나랑 강근식은 무명시절을 꽤 오래 보냈는데, 그때 서울 명동에 위치한 노래바에서 팝송을 번안해 불렀다.” 대부분의 통기타 가수들이 팝송 번안곡만 부르던 시절 이장희는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을 선보이며 시대를 한발 앞서간 대한민국 원조 싱어송라이터였다.

십여 곡의 노래를 부르면서도 지치지 않았다. 과거 이장희는 쎄시봉의 멤버로 20대의 찬란한 나날을 보내던 중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인생의 전부였던 음악마저 놓아버린 채 홀연히 미국행을 택했다. “미련이 남아도 어쩔 수 없었다.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미국으로 건너간 가수 이장희는 레스토랑, 의류업, 교포 라디오 방송을 하며 생활 전선에 매달렸다. 다시 음악이 1순위가 됐다는 지금 “그동안 음악을 잊고 살았었는데 공연하는 게 너무 감격스럽고 가슴 벅차다.”

미국에서도 자연환경을 보러 다니길 좋아했다던 이장희는 이곳에 아내, 자식까지 데려와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유명한 가수였지만 미국에서는 백그라운드 없이 다시 출발선에 섰다. 3년 동안 가족들과 미국살이를 했지만 어느 날 아내가 쪽지 하나만 남겨둔 채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떠났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곡이 탄생했다. 그때의 감정을 토해내듯 담담하게, 때론 울부짖으며 무대를 압도했다.

공연장이 생기니 음악 동료와 마음껏 연습하고 배고프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울릉도의 전경에 취할 수 있다. 이 아름다운 걸 아름다운 울릉도에서 할 수 있다. 이장희는 혼자가 아닌 음악 동료와 함께하고 싶다며 강조했다. 그는 “이 공연장에 후배 가수들과 인디밴드도 와서 공연하면 좋겠다. 음악하는 많은 후배 가수들이 편히 와서 쓰고 공연도 하는 음악인들의 보금자리가 됐으면 좋겠다”라며 소박한 꿈을 전했다.

heilie@sportsseoul.com

사진 | 울릉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