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가 요구하는 CVID는 北에 '항복 시나리오'…단계적 해법 필요"
"美가 해온 건 '위험 회피'…北체제보장 약속은 상호공존 시간 필요"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김연숙 기자 = 미국의 저명한 핵 과학자인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가 미 스탠퍼드 대학 국제안보협력센터와 함께 28일(현지시간) 발표한 보고서는 북한 비핵화를 위한 기술적 관점의 로드맵을 담고 있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 내 강경파가 요구하는 리비아식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만큼 시간이 걸리더라도 단계적으로 비핵화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는게 보고서의 핵심이다.

무엇보다도 연구진은 리비아식 CVID가 사실상 북한에 대한 '항복 시나리오'라는 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특히 핵무기를 북한 외부로 반출하는 것은 순진하고 위험한 생각이며, 이를 조립한 북한 과학자들이 스스로 해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괄타결식 해법 대신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으로 3단계 접근을 제안했다.

첫해에 핵 프로그램을 '중단(halt)'하고, 이어 2∼5년간 이를 '점진적으로 철폐(roll back)'하며 마지막 6∼10년간 이를 '제거(eliminate)'하는 수순을 밟는 과정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처음에 핵실험을 비롯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IRBM(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플루토늄이나 고농축 우라늄 생산, 핵·미사일 기술 수출 등을 중단하고, 이어 서서히 가동을 줄이거나 점진적으로 철폐해나가며, 최종적으로 이를 없애거나 해체한다는 구상이다.

이들 단계는 중첩될 수 있으며,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펼쳐지느냐가 시간표를 단축할지 연장할지 결정할 것이라고 연구진은 말했다.

연구진은 또 과거 미국의 대북협상 과정은 '위험 관리'가 아니라 '위험 회피'였다고 비판하고, 북한에 있어 민간 핵프로그램이 갖는 중요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민간 핵 프로그램과 평화로운 우주 프로그램 확보가 북한한테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지난 17년간 미국은 이런 민간활동을 군사 위장 목적으로 보고 일관되게 부정해왔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지적했다.

전기생산 혹은 의학연구용 원자로가 플루토늄 생산으로 전용될 수 있을지라도 그 위험도는 관리 가능한 수준이고, 지금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북한의 원자로에 비하면 위험 수준이 낮다는 논리다. 적절한 검증 규약(protocol) 아래에서는 지금의 수준으로 핵·미사일 프로그램이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구진은 이러한 단계적 접근법은 북한이 체제안전을 보장받을 때까지는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에 근거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체제 보장은 단순히 미국이 북한에 약속하거나 서면으로 합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당한 기간의 공존과 상호의존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완전하고 신속한 비핵화'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단계적 접근법이 트럼프 행정부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는 북한이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은 조치를 먼저 이행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보고서는 제언했다.

지난 24일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한 것 역시 그 조치 중 하나로, 연구진은 북미정상회담 전 혹은 그 즈음에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 불능화와 같은 추가 조치가 이행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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