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했던 축구 인기 들불처럼 살려내
이번 대회 최대의 다크호스로 등장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넵스키역은 국제축구연맹(FIFA)이 공식으로 마련한 길거리 응원장 '팬 페스트'가 인접한 곳이다. 현지시간 20일 자정, 넵스키역은 엄청난 열기에 휩싸였다. 경기장에서 러시아와 이집트의 월드컵 2차전을 '직관'한 팬들과 팬 페스트에서 숨죽이며 지켜보던 팬들이 서로 만났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러~시아, 러~시아!"를 외쳤고 지하철 안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함성이 울려퍼졌다. 러시아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눈 감고 말 없이 이동하던 이집트 팬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넸다. 그러더니 이내 "살라, 한 골"이라고 놀렸다.

열기에선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2002년 월드컵 개최국 한국의 느낌이 꽤 묻어났다. 러시아가 이집트를 3-1로 누르고 16강행 9부능선까지 다가간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엔 웃음과 환호가 넘쳤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70위로 참가국 중 순위가 가장 떨어지는 개최국 팀, 직전 평가전에서 오스트리아에 패하고 터키와 비기는 등 졸전을 펼쳐 냉소적인 시선까지 받았던 러시아 대표팀은 이제 러시아의 희망과 자랑이 됐다. 지난 15일 사우디아라비아와 개막전을 5-0 대승으로 마무리한 러시아는 이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함께 2017~2018시즌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던 모하메드 살라의 이집트까지 물리치며 이번 대회 최대의 다크호스가 됐다. 러시아는 16강에서 스페인 혹은 포르투갈과 만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어느 팀을 만나도 두려움 없이 싸울 저력을 선보이고 있다.

러시아인 모두가 이번 월드컵을 지켜보는 것은 아니다. 공항이나 번화가의 텔레비전에선 월드컵이 아닌 다른 프로그램이 흘러나오는 경우도 많다. 월드컵 시청을 요구하면 "이 프로그램이 더 재밌다"며 주인이 거부한 적도 있다. 러시아 최고 인기의 스포츠는 축구가 아니라 아이스하키에 더 가깝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대표팀이 2연승을 챙기면서 월드컵 열기가 들불처럼 살아나고 있다. 경기장에서 만난 알렉세이 로마노프 씨는 "평창 올림픽에서 남자 아이스하키팀이 금메달을 따내 박수를 받았다. 이제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월드컵에서 개최국의 좋은 성적은 흥행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1998년 프랑스가 우승했고 2002년엔 한국이 4강, 일본이 16강에 올랐다.

그러나 2010년 남아공의 조별리그 탈락, 2014년 브라질의 독일과 준결승 1-7 대패는 최근 월드컵의 재앙 같았다. 러시아는 일단 16강 진출로 자국 월드컵의 열기 저하를 막았다. 거스 히딩크와 딕 아드보카트, 파비오 카펠로 등 명장들을 줄줄이 영입하고도 월드컵에서 무너졌던 러시아는 자국과 동유럽에서 잔뼈가 굵은 스타니슬라브 체르체소프 감독을 데려와 가장 러시아다운 힘과 조직력의 축구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스페인 비야레알에서 뛰고 있는 팀내 유일의 빅리거 데니스 체리세프(3골), 개막전에서 맹활약하며 주가를 높인 22살의 알렉산드르 골로빈 등이 러시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스타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