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환호가 절망의 탄식으로 바뀌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기간 잉글랜드는 16년 전 한·일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를 보는 듯하다. 세계 최고의 리그를 보유한 나라가 월드컵 한 골, 한 골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건 지긋지긋한 ‘메이저 징크스’를 털어낼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A대표팀이 메이저 대회에서 늘 고개 숙이는 모습을 지켜본 이들에게 28년 만에 ‘월드컵 4강’은 모처럼 맛보는 희열이다. 하지만 잉글랜드 팬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1966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우승 이후 52년 만에 우승컵을 찾아오는 것이다. 무엇보다 16년 만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종 득점왕에 빛나는 해리 케인이 주장 완장을 단 만큼 ‘축구 종가’의 위상을 제대로 세울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12일(한국시간) 러시아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크로아티아와 4강전 90분은 이들에게 잔인한 시간이었다. 축구하면 빼놓을 수 없는 도시 리버풀, 그리고 리버풀의 상징과 같은 비틀즈 동상으로 유명한 피어 헤드(Pier Head)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앞에 모인 8000여 팬들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나라가 축구 열기로 워낙 뜨거운 탓에 리버풀 시청과 의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길거리 응원을 독려했다. 현지 시간으로 킥오프 3시간 전인 오후 4시부터 개방했는데, 사전 인터넷을 통해 1파운드 입장권을 구매한 시민들이 피어 헤드에 모였다. 개장과 함께 부부젤라를 불거나 잉글랜드 국기를 몸에 두른 사람의 행렬로 가득했다.

경기 전 만난 시민은 의외로 ‘즐기자’는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28년 만에 4강에도 만족한다는 분위기랄까. 리버풀 토박이라는 네일(53) 씨는 “우리가 2-0으로 이기리라고 생각한다”며 “만약 결승에 나가지 못하더라도 (4강) 결과에 만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한 여성 팬도 “골키퍼 픽 포드와 조던 헨더슨(리버풀 소속)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크로아티아에도 (리버풀에서 뛰는) 데얀 로브렌이 있지 않느냐”며 “(결과에 관계없이) 그들이 다시 돌아오면 모두 영웅이 될 것”이라고 웃었다.

이들의 여유로움은 그러나 킥오프 호루라기 이후 진중한 자세로 돌변했다. 대형스크린 앞에 서서 간절하게 두 손을 모으며 응원하거나, 선수 동작하나하나에 자기도 모르게 손과 다리가 움찔거리는 팬들의 모습으로 진풍경이 벌어졌다. 잔디밭에 설치된 또다른 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인 어린이와 노인들도 엄숙한 표정으로 바라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전반 5분도 채 되지 않아 키어런 트리피어의 프리킥 선제골이 나왔을 땐 리버풀 시내 전체가 들썩였다. 피어헤드에 모인 8000여 시민이 일제히 일어나서 함성과 함께 들고 있던 음료를 뿌려대면서 이미 결승 고지를 밟은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차례 연속으로 연장 승부를 펼친 크로아티아가 눈에 띄게 몸이 무거워 보였고, 잉글랜드가 경기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지 않은가.

케인이 몇차례 기회를 놓칠 때마다 “컴~온~”을 외치며 아쉬워했으나 누구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결승행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결승 상대인 프랑스 얘기를 주고받을 무렵인 후반 23분 이반 페리시치의 동점골이 터졌을 땐 거짓말처럼 피어헤드에 정적이 감돌았다. 상대 거친 플레이에 욕설을 내뱉던 일부 시민도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승부가 연장으로 흐르고, 크로아티아 경기력이 무섭게 살아나면서 왠지 모를 불길한 마음을 느꼈나보다. 응원의 열기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결국 연장 후반 4분 마리오 만주키치의 역전골이 나왔을 땐 대다수 사람이 얼굴을 감싸쥐었다. 눈물 흘리는 팬도 여럿 보였다. 제이미 바디가 교체로 투입된 뒤 모든 희망을 내건 듯 기도하는 팬의 모습도 잡힌다.

결과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월드컵 제패 꿈은 또다시 4년 후로 미뤘다. 삭막한 분위기를 예감했는데, 실망감이 다소 컸던지 팬들은 조용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날만큼은 지역 라이벌도 없다. 잉글랜드 축구가 이번 대회에서 그나마 세계 축구에 존재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서로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