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인류'펴낸 67세 미주 한인 출신 서울 가회동 집사 빈센트 리 "주방으로 돌아가자"

[수요화제]

직업소명…새로운 삶의 즐길거리 필요
가족 나라 지구 위해 요리 먼저 배워야
큰 주방 등 나에게 맞는 집수리도 중요
난 서빙하는 집사, 할수록 더 많이 누려

서울 가회동 골목의 한 한옥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대문 밖까지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67세 미주 한인인 빈센트 리(Vincent Yee)의 집이다.

그가 직접 자신의 쓸모에 맞게 고친 한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손님을 초대해 웃고 즐길 수 있도록 주방과 다이닝룸을 크게, 침실 거실 등 나머지 공간은 작게 만들었다. 10명이 앉아도 넉넉한 식탁에서 손님들이 주방에 서서 요리하는 그를 지켜본다. 그는 요리하기 편하도록 동선을 짠 주방에서 맛있는 요리를 하나둘 완성해 손님들에게 서빙한다. 요리를 맛있게 즐기는 사람들은 아내의 친구들이다.

한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그는 코넬대 환경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뱅크오브아메리카, 휴즈항공 등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이후 에너지 관련 회사를 창업해 운영하다가 예순을 넘기고는 은퇴해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매일 아침 아내에게 아침상

북촌에 한옥을 마련한 것은 디자인을 하는 한국인 아내를 위한 배려다. 아내가 더 많이 행복할 수 있도록 집사를 자처한 그는 매일 아침을 아내에게 차려주고 아내의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을 만들어준다. 청소, 세탁 등 집안일도 그의 몫. 은퇴 후 이처럼 아내와 집안을 위해 사는 삶이 행복하다는 그는 자신의 철학을 에세이집 '쓸모 인류'(몽스북·강승민 공저)에 담아 펴냈다.

책 제목이 왜 '쓸모인류'일까? 그는 은퇴한 남성의 삶은 '쓸모'에서 멀어지다 못해 폐기처분되는 지경이라는 것을 목격했다. 은퇴한 남성은 정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종족인 걸까? 그는 직업을 삶의 전부로 알고 살아온 남성들이 은퇴 후 직업이 소멸한 상태에서 새로운 삶을 즐길 거리를 찾는데 소극적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빈센트 리는 "나는 우리 집안의 집사다. 사실 모두 대접받고 싶어하는데 집사는 누군가에게 서빙하는 사람이다. 집사는 집안의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할 줄 아는 게 많아지기 때문에 결국은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은퇴는 새로운 시작"

은퇴 후에도 요가, 다도, 요리 등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나가는 그는 요즘에는 친환경 에너지를 이용해 공간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신재생에너지발전설비기사 자격시험에 도전하고 있다. 나이가 들었다고 자신의 쓸모를 팽개치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은퇴한 남성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요리다. 정직하게 요리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내가, 우리 가족이, 나라가, 지구가 튼튼해진다”고 말했다.

집수리도 그가 애정을 가지고 배우고 실천해나가는 종목 중 하나다. 20평짜리 가회동 한옥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고친 것도 집수리에 대해 기본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침실로 쓸 작은 방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방을 모두 터 주방과 다이닝룸으로 만들었다.

"내가 배운 것들을 실험해보는 마음으로 이 집에 다 넣었다. 집에서 주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주방을 제일 크게 배치했고 요리하는 동선에 맞게 가구며 가전제품 등을 짜 넣었다. 자주 쓰는 그릇들은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오픈 선반장을 짜서 수납했고 아일랜드 식탁도 바짝 붙여 동선을 최소화했다. 우리 집에는 냉동고가 없다. 신선한 재료를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죄표 잃은 남성들에 고언

한국 남자들이 요리와 집수리에 좀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기를 바란다. 그 두가지야 말로 삶을 윤택하게 하는 필수요소라고 믿기 때문이다.
"백년 동안 살 집이라고 생각하고 물건을 고를 때도 신중하게 고른다. 집은 비싸야, 예뻐야 좋은 게 아니다. 내가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이 꾸민 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가치"라는 그는 은퇴 후 좌표를 잃은 남성들에게 "당장 주방으로 들어갈 것"을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