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청구권협정상 '외교적 협의' 요청…국제재판소行 가시권 둔채 韓정부 압박
외교협의 거부는 韓정부도 부담…'위안부 포함 포괄적 협의' 역제안 가능성도
3·1 백주년에 국민정서 '인화성' 높아…文대통령 "정치쟁점화 말라" 日에 일침

(서울=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일본이 한일 청구권 협정상의 '외교적 협의'를 요청하는 등 분쟁 해결 절차에 착수하면서 '징용 갈등'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일본은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이 최근 강제동원 피해자 변호인단이 신청한 신일철주금 한국 자산 압류 신청을 승인한 데 대해 9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3조'에 따른 '외교적 협의'를 요청했다.

청구권 협정에 입각한 외교적 협의는 결국 국제법정에 판결을 구하는 등의 절차에 들어가기 앞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번 갈등이 대법원 판결이라는 사법부 결정으로 불거졌다는 점에서 외교당국간의 협의를 통해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많다. 때문에 징용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은 점점 어려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는게 대체적인 평가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에 "일측의 청구권협정상 양자협의 요청에 대해 면밀히 검토할 예정"이라며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사법 절차를 존중한다는 기본 입장 하에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과 상처를 실질적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점과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대응 방안을 마련해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러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갈등과 반목을 야기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며, 따라서 냉정하고 신중하게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일본이 협정에 따른 첫 번째 카드를 냈지만 일단 한국 정부가 받아들여야 성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가 면밀한 검토와 신중한 관리를 강조하는 것도 본격적인 분쟁 해결 절차 돌입에 대한 부담이 읽히는 대목이다.

또 정부는 우리가 2011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3조 1항에 따른 외교적 협의를 요청했을 당시 일본이 '위안부 문제는 청구권협정에 따라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응하지 않았던 사례도 판단에 참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한국 정부로서도 일본 기업의 재산에 대한 법적 조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일본 측의 협의 신청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외교적 부담이 따른다는 지적이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도 이날 인터뷰에서 "청구권협정에 관한 분쟁이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기 때문에 협의를 요청했다"면서 "명백하게 분쟁이 있어 한국 정부가 협의에 응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문제가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는지에 대해 양국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애초에 '외교적 협의'로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분석도 있다.

또 청구권협정에는 '외교적 협의'에서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한일 양국이 합의하는 제3국이 참여하는 중재위원회를 구성해 해법을 찾게 되어 있으나 우리 정부는 중재위는 해법의 하나로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일본이 결국 이 사안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기 위한 명분을 쌓기 위해 '외교적 협의'를 요청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일본은 그간 독도 문제도 ICJ에서 다루자고 주장해왔으나 우리 정부가 거부하는 상황이다.

결국 이번 사안에 대해 우리 정부로서는 이번 협의 신청에 대해 개별 대응하기보다는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 이후 이낙연 국무총리 중심으로 우리 정부가 검토중인 '대응 방안'의 큰 틀 속에서 접근해 나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 외에도 한일 간에 풀어야 할 현안이 많기 때문에 지금의 한일 국장급 협의처럼 과거 한국 측이 협의를 요청했던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보다 다양한 이슈를 다루는 방식의 논의가 바람직하지 않겠냐는 시각도 정부 내에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정부의 대응 방안 마련이 지연될 경우 일본 기업에 대한 우리 법원의 조치가 속도를 내고, 이에 따라 일본이 자국내 한국 기업을 상대로 직간접적 경제 보복을 취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럴 경우 양국 여론이 더욱 악화하며 한일관계가 한동안 반등의 계기를 찾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더욱이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여서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양국 정부간 갈등이 국민 감정의 급격한 악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예상도 나온다.

하지만 북핵 문제 등 한반도·동북아 안보 현안 관련한 한일 공조가 중요하고 민간 교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양국이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만큼, 갈등이 국민 간의 감정싸움과 국제 여론전으로 비화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양국 모두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겠냐는 분석도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날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가 조금 더 겸허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면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이 그 문제(배상 판결)를 정치 쟁점화해서 논란거리로 만들고 확산시키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정치공방으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외교부 다른 당국자는 일본 측 협의 요청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식에 대해 "적절한 시점에 가부간에 답을 줘야 할 것"이라며 "무응답으로 계속 가는 것은 아닌 걸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이어 관세 인상 등 일본의 향후 '보복성' 조치 가능성에 대해서는 "세계무역기구(WTO) 룰을 벗어난 조치는 취하지 않겠다는 것이 일본 입장이라는 일본 (매체) 보도가 나온 바가 있다"며 "문명국가에 걸맞은 조치들을 취할 것으로 저희는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hapyr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