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5G칩 공급할 업체, 퀄컴 외 없어
인텔은 합의 뒤 "5G 통신칩서 철수"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 "애플에는 좋고, 퀄컴에는 더 좋은 합의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6일(현지시간) 애플과 퀄컴이 통신칩 로열티를 둘러싼 최대 270억 달러(약 30조원) 규모의 소송을 중단하고 협력관계를 복원하기로 합의하자 이같이 평가했다.

이날 양사 간 합의는 시장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미 언론들은 이날 공개변론이 시작되면서 지루한 장기 소송전이 시동을 건 것으로 관측했으나 변론이 시작되자마자 종결됐다.

양사가 공동성명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애플은 퀄컴에 로열티를 지급하는 대신 6년간의 라이선스 체결, 다년간의 칩세트 공급 등에 합의했다.

합의 후 양사 주가를 보면 퀄컴이 이번 합의의 수혜자임이 뚜렷하다. 퀄컴 주가는 23.2% 폭등한 뒤 마감했지만 애플 주가는 0.01% 오르는 데 그쳤다.

WSJ은 그러나 "재무적 관점에서 이 분쟁은 퀄컴에게 훨씬 더 큰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폭스콘 등 애플과 계약한 위탁생산 업체들은 퀄컴에 수십억 달러의 로열티 지급을 보류했고, 퀄컴은 아이폰이나 기타 애플 기기에 모뎀칩을 공급할 기회를 날렸기 때문이다.

실제 통상 퀄컴 영업이익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특허료의 수입은 작년 9월 기준으로 애플이 소송을 내기 전인 2년 전과 견줘 33%나 하락했다.

퀄컴은 이날 합의로 주당 순익이 2달러 오를 것으로 기대했다.

애플에도 손해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퀄컴은 여전히 업계 1위 통신칩 업체였고 5G 기술을 제품에 도입하는 데도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애플이 퀄컴과 틀어진 뒤 새 공급업체로 확보한 인텔의 경우 내년 하반기가 돼야 첫 5G 모뎀칩을 대량생산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었다.

여기에 퀄컴과 인텔을 제외하면 5G 모뎀칩을 생산할 수 있는 업체는 삼성전자와 대만의 미디어텍, 중국의 화웨이 정도다. 더구나 삼성전자와 화웨이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의 경쟁자다.

WSJ은 이를 두고 삼성이나 화웨이 같은 애플의 경쟁자들에 견줘 5G 시장에서 "애플을 한참 뒤처지게 할 위협 요소"라고 평가했다.

삼성이나 화웨이 등 애플의 경쟁사는 이미 5G 스마트폰을 경쟁적으로 선보이는 가운데 애플은 여전히 출시 일정조차 잡지 못한 형편이었다.

시장에선 뜬금없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런정페이 화웨이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우리는 애플에도 열려 있다"며 5G 칩을 애플에 공급할 수 있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었을 수 있다.

5G 모뎀칩은 스마트폰과 중계기를 연결하고 데이터를 전송하는 데 쓰이는 작은 반도체다.

5G는 특히 4세대 이동통신인 LTE와 견줘 속도가 20배 이상 빠르고 저(低)지연을 실현해 자율주행이나 원격의료, 스마트시티, 증강현실(AR) 등 차세대 기술 구현에 핵심 인프라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결국 애플이 5G 경쟁에 빠르게 합류하기 위해서는 퀄컴과 손을 잡는 것 외에는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 이번에 전격적인 합의가 이뤄진 주요 배경의 하나로 풀이되고 있다.

이는 또 퀄컴의 5G 칩 공급 일정에 따라 애플의 5G 스마트폰 도입 일정도 그만큼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인텔은 이날 애플과 퀄컴의 합의가 나온 뒤 5G 스마트폰용 모뎀칩을 생산하려던 계획을 접었다고 발표했다.

애플이 퀄컴으로부터 5G 칩을 공급받으면 인텔로서는 최대 고객을 잃게 된다.

WSJ은 "향후 몇 년간 (이동통신) 시장을 지배할 것으로 예상되는 차세대 모바일폰의 핵심부품을 놓고 각축하던 퀄컴의 주요 경쟁자가 사라졌다"고 평가했다.

인텔은 이번 결정이 애플-퀄컴의 합의와 관련된 것인지 밝히지 않았다.

인텔은 다만 "5G 사업의 수익성이 불투명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5G가 여전히 전략적 우선순위에 놓여 있고, 다른 기기·플랫폼을 포함해 5G를 통해 실현할 수 있는 수익이 있는지 평가 중이라고 덧붙였다.

시장 분석가들은 인텔이 5G 모뎀칩 사업을 매각할 수도 있다고 관측하고 있다. 다만 애플 같은 고객이 없는 한 매수자가 선뜻 나설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고 있다.

또 인텔의 모뎀칩 사업이 다른 사업 부문에 비해 수익성이 낮았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이 인텔이 고수익 사업에 집중하면서 장기적으로 가치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란 시각도 있다.

실제 인텔 주가는 이날 발표 후 시간 외 거래에서 4% 올랐다.

WSJ은 "시장은 양사 간 합의의 최대 승자로 퀄컴을 지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며 "하지만 이는 단지 궁지에 몰린 퀄컴이 훨씬 잃을 게 많았다는 현실을 보여줄 뿐"이라고 평가했다.

sisyph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