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이지연 기자

미투가 한번 물꼬를 틀고 나니 이젠 30년 전 이야기도 수면 위로 떠오른다. 잊을만 하니 또 터졌다. 이번엔 오페라계의 신으로 알려진 '플라시도 도밍고'다.

8명의 오페라 가수, 1명의 댄서의 진술을 담아 도밍고가 오페라계에서의 절대적인 지위를 이용해 개인 레슨을 해줄테니 아파트로 오라는 등의 성적인 요구를 하고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경력에 악영향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드러난 숫자만 9명이지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도밍고는 "그들의 주장은 부정확 하고 내 모든 상호 작용과 관계는 항상 합의된 것이었다"고 일관했다. 대다수 여성들은 도밍고의 이러한 반응에 냉담했다. 사과도 아닌 애매모호한 태도가 여성들을 더욱 화나게 했다. 힘없는 여자들을 상대로 권력을 남용한 그는 끝까지 매너남 코스프레를 하며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최근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약자들이 조금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회는 아직도 절대 권력을 쥔 강자 앞에선 한없이 비굴하기만 하다.

법도 상식도 대화도 통화지 않는 마법의 원리 앞에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봐 전전 긍긍한다. '줄 잘서라'는 말이 이래서 나왔나 싶다. 돈과 명예, 권력 앞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은 어딜가나 마찬가지다.

이쯤해서 이번 도밍고 성추행 의혹에 대한 남자들의 생각이 궁금해 진다. 짐작한 대로다. "이제 와 30년 전 일을 왜 끄집어 내냐"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남자와 여자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오죽하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글로벌 베스트 셀러가 됐을까. 남녀의 차이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이해를 이끌어 낸 이 책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선정됐다. 그런데 아무리 남녀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려 해도 쉽지가 않다. 최근 한국에서 여자 연예인과 연예인 지망생 수십명을 상대로 성관계 동영상을 찍고 불법 유포한 정준영이 법의 처벌을 받았을 당시 일부 남자들의 첫마디는 충격적이었다. "멍청하게 걸려가지고. 재수가 없었구만" 성 정체성에 대한 개념을 묻기 조차 부끄러울 정도다.

도밍고에 대한 미투 고발 이후 일부 공연이 취소되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도밍고를 응원하는 세력이 늘어나고 있다. 어느 저명한 음악 평론가는 "그가 LA오페라 총감독과 예술감독을 사임하는 정도로 마무리 될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9명이 모두 무명이며 도밍고는 그 누구도 넘볼 수없는 파워를 가진 오페라계의 거목이기 때문이다.

30년전에도 지금도 강한 남자 앞에서 약한 여자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냉랭하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남자'는 안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