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4개상 석권·겸손한 수상소감에 외신 찬사 줄이어
"품격과 유머, 대중과 평단의 호평 새로운 단계로 올라서"

영화 '기생충'으로 비영어권 작품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쥔 봉준호 감독이 특별한 수상소감으로 다시 한번 호평을 받았다.

뉴욕포스트는 9일 "봉준호는 '성자'였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봉 감독의 특별한 수상소감을 다뤘다.

뉴욕포스트는 "경쟁 후보로 오른 동료에게 감사를 전하는 건 흔하지만, 패자에게도 진정한 기쁨의 눈물을 쏟게 한 승자를 본 적 있는가?"라며 "그게 바로 봉 감독"이었다며 극찬했다.

봉 감독은 앞서 감독상 수상소감 도중 영화 '아이리시맨'으로 후보에 올랐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진심 어린 존경을 표해 객석의 환호를 받았다.

봉 감독이 "영화 공부를 할 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고 책에서 읽었다. 그 말은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이었다"고 말하자 객석에서는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받은 격렬한 감동을 감추지 못한 채 봉 감독을 향해 '엄지척'을 보내는 스코세이지 감독의 환한 표정도 화제가 됐다.

그는 또 같은 감독상 후보에 오른 다른 감독들에 대한 존경심도 잊지 않았다.

봉 감독은 "저의 영화를 아직 미국의 관객들이나 사람들이 모를 때 항상 제 영화를 리스트에 뽑고 좋아하고 했던 '우리 쿠엔틴 형님'이 계신데, 정말 사랑한다"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후보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스')을 추켜 세웠다.

또한 그는 토드 필립스 감독(후보작 '조커')나 샘 멘데스 감독(후보작 '1917')을 거명했다. "같이 후보에 오른 토드나 샘이나 다 제가 너무나 존경하는 멋진 감독들인데, 이 트로피를 정말, 오스카측에서 허락한다면, 텍사스 전기톱으로 다섯개로 잘라서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해 관중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AFP통신은 황금종려상과 골든글로브, 영국아카데미(BAFTA)에서 돌풍을 일으킨 봉 감독이 오스카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보도했다.

AFP통신은 "장르를 넘나드는 스릴러와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로 잘 알려진 봉 감독은 '기생충'이전에도 여러 작품으로 대중과 평단의 호평 끌어냈다"라면서 "이날 할리우드에서의 승리는 그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4관왕' 봉준호 감독에게도 큰 사건이지만
"오스카에겐 훨씬 더 큰 사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관전 포인트는 비영어 영화인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 여부였다. 평단의 호평과 상업적 성공, 칸 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유수 영화제의 수상을 모두 누렸지만 오스카 작품상은 백인과 영어권을 중심으로 한 미국 주류 문화계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봉 감독마저도 '오스카는 지역 축제(They're very local)'라고 답했듯 아카데미는 올해도 안전한 선택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으나 결과는180도 다르게 나왔다.
자막과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은 것은 장르를 오가며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도 러닝타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선사한 '기생충'의 재미와 작품성이다. USA투데이는 "'기생충'은 봉 감독 커리어의 정점이며 영화사에 빛날 예술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92년의 오스카 역사는 '기생충'이 외국어 영화 최초로 작품상 수상을 하는 순간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AP통신은 "외국어 영화를 늘 별도의 항목으로 좌천시켰던 아카데미 시상식의 새 분수령이다. 기생충이 할리우드가 관행을 벗어던지고 진보의 신호를 보내게 했다"고 분석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오스카의 새 시대를 알렸다. 봉 감독 본인에게도 큰 사건이지만 오스카에 더 큰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에서 아시아 영화가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타임지는 "기생충의 성공은 미국에서 외국어 영화, 특히 아시아 영화 전반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봤다.

▣봉준호의 가족

월북 소설가 '구보 박태원' 외손자
예술가 집안으로 유명

영화인 봉준호 감독을 자라게 한 그의 집안 배경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봉 감독은 예술가 집안으로 유명하다. 봉 감독의 어머니 박소영씨는 월북 소설가 구보 박태원(사진·1909~1986)의 딸로, 봉 감독은 그의 외손자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1930~4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다. 박태원은 이태준, 이효석, 이무영 등과 9인회 동인으로 활동했고, 이상(李箱·1910~1937)과는 단짝 친구로 어울렸다. 이후 월북해 1970~80년대까지 활동했다. 특히 창작노트 자체를 소설화하는 실험적인 기법으로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이후 여러 작가들에 의해 재창작되기도 했다. 박태원은 안(眼)질환을 앓다 실명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구보'는 평생 안경 신세를 지는 나쁜 시력을 가진 사람이다.
봉 감독의 아버지인 고 봉상균 전 영남대학교 미대 교수는 국립영화제작소 미술실장을 지낸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봉상균 교수는 문화공보부(지금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미술실장으로 근무하며 초창기 영화계에서 큰 역할을 했다. 대구 출신인 봉준호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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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먹어도 고" 적극 지원해준 아내
아들도 영화감독 활동


봉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언급한 그의 아내 정선영씨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씨는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95년 결혼했으며 봉 감독의 단편 영화 편집 스태프로도 참여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봉 감독은 최근 미국 잡지 '베니티페어'와의 인터뷰에서 "대학교 영화동아리에서 영화광인 아내를 만났다"며 "아내는 나의 첫 번째 독자였다. 대본을 완성하고 그녀에게 보여줄 때마다 너무 두려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들 부부는 영화 '살인의 추억' 전까지는 수입이 적어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고백한 바 있다. 과거 봉 감독은 "대학 동기가 쌀을 가져다줄 정도였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럼에도 정씨는 묵묵히 남편의 영화 활동을 지지했다. 봉 감독은 "아내에게 1년치 생활비 모아놓은 것이 있으니 1년간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아내가 '못먹어도 고'라며 아낌없이 날 지원해줬다"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봉 감독의 아들 효민씨도 영화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효민씨는 아버지인 봉 감독의 후광을 얻는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본명 '봉효민'대신 '효민으로만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의 봉준호 감독과 아내 정선영씨.

봉준호 감독 차기작은 무슨 작품?
"실화에서 영감받은
서울재난 호러 액션"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에 관심을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 그는 한국 영화와 영어 영화 두 가지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둘 다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고, '기생충'(제작비 150억원) 정도 규모로 구상 중이라고 전했다. 그는 한국 영화에 대해 "대한민국 서울에서 일어나는 독특하고 무서운 사건을 다룬다. 2001년 아이디어를 구상해 18년째 개발 중"이라며 "굳이 설명한다면 서울에서 재난이 발생하는 호러 액션"이라고 소개했다. 영어 영화는 2016년에 본 CNN 뉴스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전했다. 또한 봉 감독은 '기생충'을 미국 HBO 드라마로 제작하는 작업에도 참여한다. 영화 '빅쇼트', '바이스'를 연출한 애덤 매케이와 함께 책임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