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만의 문제 아니다…내 딸도 신체의 자유 누리게 하고 싶어"
'로 대 웨이드' 폐기 후 저소득 여성 의료접근 제한…"경제와도 연관"
생명·가족 중시 보수, 문화전쟁 양상…"경제 넘어 가치 따라 표심 이동"
(피츠버그[미 펜실베이니아주]·워싱턴=연합뉴스) 김연숙 기자 = 여성의 낙태 권리를 보장하고 체외인공수정(IVF·시험관) 시술을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전국적으로 낙태를 금지할 것인가 혹은 개별 주의 결정에 맡길 것인가.
일견 철학적 혹은 의학적 문제로 보이는 이 논쟁은 한달여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을 뒤흔들고 있는 첨예한 이슈 중 하나다.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부통령은 낙태권을 전면에 내세우며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날을 세우고 있다. 정부가 여성에 무엇을 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 측은 연방 차원의 낙태권을 보장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던 2022년 연방대법원 결정을 옹호하며 낙태 정책은 개별 주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본다.
한국에서 낙태 등을 포함한 재생산권(출산, 불임 치료, 피임 등 여성의 생식권과 관련한 광범위한 권리)은 사실 정치적 공론장에선 뒷전으로 밀려난 이슈다. 그러나 미 대선에선 후보 토론이나 유세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재다.
미국인들은 왜 이렇게 낙태 문제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지난달 21일(현지시간) 한국언론진흥재단과 미국동서센터의 한미 언론인 교류 프로그램 참가차 찾은 펜실베이니아주의 피츠버그시에서 접한 미국인들은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1920년 출범한 초당적 성격의 여성 참정권 단체 여성유권자연맹(League of Women Voters·LWV) 피츠버그 지부 사무실에서 만난 관계자들은 낙태는 결코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LWV 피츠버그 지부는 오랜 내부 논의를 거쳐 '여성 본인의 건강과 관련한 문제는 개인의 뜻대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피츠버그시 인권위에서 근무하며 LWV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제너비브 로셀로트(여)는 미국이 중요시하는 가치 '자유'와 연결 지어 이를 설명했다.
로셀로트는 "미국은 자유를 중요시하는 나라라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도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LWV 차원에서도 이와 관련해 여성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신체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시대에 살았지만, 지금 15살인 내 딸은 누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더 힘을 받아 낙태권 보장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며 "같은 맥락에서 아빠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LWV 피츠버그 지부 공동의장 루스 퀸트(여)는 2022년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폐기 이후 일부 주에서 지방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투표로 낙태권 문제도 함께 결정할 당시 공화당 성향이 강했던 주에서 여성 투표율이 높아지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낙태와 관련한 각자의 사연과 경험을 가진 여성들이 투표장에 더 많이 나왔고, 진보적 유권자들도 이와 관련해 표를 행사함으로써 낙태권뿐만 아니라 다른 선거 이슈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여성이라고 다 같은 의견을 가진 것은 아니다. LWV 역시 연맹의 입장을 정하는 데 있어 '낙태', '재생산권' 등 용어 하나에도 의견이 첨예하게 갈려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역시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프레스턴 샤이머는 백인 남성으로서의 의견을 추가했다. 그는 "로 대 웨이드 폐기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여성들이 어떤 폭력에 시달리며 피해를 보는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남성들도 관련 대화에 많이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퀸트 공동의장은 플로리다 등 일부 주에서는 이번 대선 투표율을 올리기 위해 투표용지에 낙태권과 관련한 질문을 추가하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해리스, 트럼프간 초접전 양상 속에 투표율이 관건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이런 장치들은 대선 결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민감한 이슈가 전면에 등장하다 보니 선거 여론조사 역시 정교해지는 모습이다.
LMW 피츠버그 지부 전 의장 모린 그로샤이더는 "오랫동안 설문조사 전화를 받았지만, 올해 처음으로 '지금 대답하는 데 안전한 상황에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의견을 묻기 전에 주변에 남성이나 그 의견에 영향을 미칠 만한 다른 사람이 없는지를 물은 것인데, 색다르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낙태 문제는 경제와도 무관치 않다. 지난달 25일 워싱턴DC에서 만난 아메리카대 정책연구소 에이미 데이시 디렉터는 로 대 웨이드 폐기 판결 후 현실에선 단순히 주별로 낙태 관련 정책을 정하는 문제를 넘어, 관련 의료 서비스 금지가 실질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거 정책 연구자인 데이시는 "여성들이 임신, 낙태 관련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고, 병원들도 문을 닫고 있다"며 "가능한 사람은 다른 주로 가서라도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겠지만 저소득층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학계에선 취약계층 여성의 낙태 부담이 커져 이들이 원치 않는 출산을 하면 결국 자녀 세대에도 '가난의 대물림'이 불가피하다는 분석도 있다.
경제학자 출신인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2022년 5월 상원 청문회에서 "여성의 낙태권이 제한받으면 여성의 빈곤율이 늘고 이들이 출산한 자녀의 기대소득 또한 줄어든다는 연구가 있다"고 낙태권의 경제적 파급력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태아의 생명과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보수 진영 에서는 낙태 금지는 물론, IVF 시술 일부 제한을 주장한다. 일부 강경 보수주의자들은 경구 피임약, 사후 피임약 같은 피임도 금지해야 한다고도 한다.
이 같은 논쟁을 확장하면 동성결혼, 성소수자(LGBTQ+) 권리 보장, 성별·인종 다양성 보장 등 소위 '문화전쟁'의 범주에 속하는 문제와도 닿는다. 특히 이번 대선은 경제·계급 등 기존 정치 문법을 벗어나, 사회 문제에 대한 가치 성향에 따라 표심이 움직이는 탓에 문화전쟁으로 요약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지지층 표심 잡기도 한층 까다로워진 상황이어서 정치권 관계자들도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지난달 23일 워싱턴DC 미 의회에서 만난 마지 히로노(하와이·민주) 상원의원의 조지 플린 보좌관은 "과거 사회 문제에 있어 진보적이면서도 부유했던 사람들이 공화당을 뽑았다면 최근엔 사회 문제에 따라 민주당으로도 가고, 노조 출신의 중산층 노동 계급이 사회적으론 보수적인 입장이다 보니 공화당으로 넘어가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외연을 확장하다 집토끼를 놓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한 의견을 묻는 말에 플린 보좌관은 민주당으로선 공화당으로 넘어가는 기존 지지층을 최대한 붙잡아 두고 싶지만, 사회적 가치에 있어선 진보적인 입장을 유지해야 해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다고 본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현재 민주당이 부각하는 경제 정책 관련 메시지에 기대를 걸면서도, 공화당이 이민·다양성 정책, 트랜스젠더 등을 소재로 문화전쟁의 전선을 부각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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