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성싶은 나무'선생님 권유로 고2 때 입문 소치 올림픽 16위 후 고공 행진…5년만에 세계 1위 우뚝

한국 설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역사를 써낸 썰매 스켈레톤의 간판스타 윤성빈은 탁월한 운동 능력을 지닌 '될성부른 나무'였다.

1994년생. 경남 남해 출신인 그는 남서울중을 졸업한 뒤 신림고에 입학했다. 고1까지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다. 운동을 좋아했다. 구기 종목을 비롯해 일반 체육 모두 능했다. 중학교 시절 잠시 배드민턴을 배운 적이 있는데, 방과 후 배드민턴을 즐기던 교사들은 윤성빈을 '호출', 셔틀콕을 주고받았다. "이 녀석 잘 치는데"라는 말을 곧잘 들으면서 '운동 하나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런 그를 눈여겨본 건 당시 신림고 체육교사 겸 농구감독으로 몸담았던 김영태(59) 관악고 교사다. 1학년에서 운동 잘하는 녀석이 있다는 동료 교사 말에 윤성빈을 만났다. 김 교사는 '독사'로 불릴만큼 교내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그런 그에게 윤성빈은 주눅이 들지 않고 특유의 친화력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뽐냈다. 김 교사도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엘리트 농구 선수 출신인 김 씨는 선수 못지 않은 체격과 키를 지닌 윤성빈을 오랜 기간 눈여겨봤고, 고2 때 "운동 한 번 해볼래?"라고 넌지시 물었다.

윤성빈은 그때까지만 해도 공부보다 노는 것을 즐기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김 교사는 자신이 담당한 체대 입시반에 합류시켰다. 제자리멀리뛰기, 팔굽혀펴기, 단거리 등 체대 입시에 필요한 기초 체력을 테스트했는데 앞서 준비한 학생보다 월등하게 앞섰다. 하다 못해 지휘봉을 잡고 있는 농구반에 합류해서 연습 경기를 뛰게 했는데 배우지도 않은 농구장에서도 존재감을 보였다. 특히 제자리에서 점프를 해서 농구 골대를 잡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내 말만 잘 들으면 (체육 전공) 대학 입학은 책임지겠다"고 김 교사가 선언한 이유다.

그러다가 그해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연세대 대학원을 졸업한 김 교사는 동문인 한국 썰매 개척자 강광배 한국체대 교수를 만났다. 당시 썰매 발전에 뜻을 둔 강 교수를 지원하고자 동문들이 힘을 썼다. 운동을 한 김 교사도 동참하게 됐다. 서울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이 그렇게 창설됐다. 김 씨는 운동 선수 출신 이사로 참여했다.

2012년 6월 어느날 이사회 겸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리던 날. 이전부터 강 교수로부터 좋은 재목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김 교사는 문득 윤성빈이 떠올랐다. 고등학생도 괜찮냐고 묻기도 했다. 'OK'였다. 김 교사는 "이사회하고 점심 먹기 전 성빈이에게 전화했다. 자고 있더라. '해가 중천에 떴는데 게을러터졌다'고 꾸지람을 하면서 당장 (선발전 장소로) 나오라고 했다"고 밝혔다. 윤성빈은 영문도 모르고 반바지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잠실로 이동해 한국체대에 왔다. 도착해서 보니 스켈레톤 대표 선발전. 준비 없이 그냥 선발전에 나섰다. 역시 달리기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뽐냈다. 강 교수 눈에 띄어 국가대표 상비군에 포함됐다. 한체대에 합류해 그해 가을까지 전지훈련에 참여했다. 그해 9월 국가대표 2차 선발전에서 마침내 태극마크를 달았다. 대학생 형보다 스타트 기록이 1초 이상 빠를 정도로 남다른 재능을 뽐냈다.

2014 소치 올림픽을 겨냥해 무럭무럭 성장했다. 그러다가 대회를 앞두고 위기가 있었다. 짧은 구간 훈련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던 윤성빈이 엎드려서 타는 스켈레톤에 공포를 느꼈다. 점차 트랙 길이가 늘어나고 빠른 속도에 적응해야 하는 과정에서 '상남자'인 그도 고개를 저었다. 강 교수는 김 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형님, 성빈이가 울면서 (훈련장을) 나갔다"고 말했다. 윤성빈은 차마 자신의 행동에 실망을 느낄 것으로 여긴 김 교사에게 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김 교사를 만났다. "아버지도 안 계시는 데 (썰매 타다가) 아들까지 잘못되면 큰일아니냐"고 어머니는 김 교사에게 눈시울을 붉혔다. 김 교사는 단호했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개척해야 성공한다. 성빈이는 그럴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윤성빈도 일생 일대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스승 한마디에 용기를 내 훈련장에 복귀했다. 이상하리만큼 스켈레톤이 더 와 닿았다. 반드시 올림픽에 나가고 싶었다. 김 교사는 "성빈이가 '선생님 이제 (스켈레톤을) 알 것 같습니다'고 하더니 보란듯이 소치를 경험한 뒤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소치 대회에서 16위를 차지한 윤성빈은 거짓말처럼 고공비행했다. 톱클래스 선수의 선결 조건은 세계 각 코스 주행경험이 많아야 하고 스타트에서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윤성빈은 해를 거듭하며 북중미는 물론 유럽 곳곳 썰매 트랙에 익숙해졌다. 어느덧 코스를 떠올리면 쉽게 이미지 트레이닝을 할 수준이 됐다. 비시즌 기간 우레탄 바닥에서 스타트 훈련을 했던 열악한 환경도 개선됐다. 과학적인 스타트 훈련도 마찬가지다. 육상전문코치가 합류해 윤성빈의 스타트 동작까지 세밀하게 살폈고, 지난해 하계훈련에서도 올림픽 시즌을 앞두고 스타트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평창 입성 전 7차례 월드컵에서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1, 2차 대회서부터 스타트 전체 1위를 기록하는 등 가파른 오름세를 탔다. 스켈레톤은 스타트에서 0.1초를 줄이면 최종 기록은 0.3~0.4초까지 단축할 수 있다. 금메달만 5개를 따내며 스켈레톤 입문 5년 만에 세계랭킹 1위에 올라섰다. 우상이자 라이벌로 여긴 라트비아의 마르틴스 두쿠르스(34)를 완전히 제쳤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윤성빈은 기다렸다. 해가 바뀐 올해 평창올림픽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른 그는 고국의 땅에서 진정한 황제 자리에 오르겠다는 일념으로 지내왔다. 마침내 올림픽 슬라이딩센터 스타트와 트랙 레코드를 경신하는 괴력의 질주로 우상을 넘어 자신의 시대를 알렸다.

김용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