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 길어지면, 원인을 잊기 마련이다. 한참을 싸우다가 문득 ‘싸움이 시작된 이유가 뭐지?’라는 생각을 한다. 본질은 잊히고 생채기를 낸 말만 남는다. 말은 꼬리를 물고 또다른 상처를 야기하니 그 끝은 대게 파멸이다.
‘셔틀콕의 여왕’ 안세영(22·삼성생명)이 파리올림픽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목에건 게 4일(한국시간) 저녁이다. 환희에 찬 눈물을 쏟은 그는 믹스트존에서 대한배드민턴협회에 “실망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좀 강하게 했다. “더이상 함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은 대표팀 은퇴 선언처럼 비쳤다. 진의야 어쨌든, 세계랭킹 1위이자 우리나라 배드민턴 대들보가 최고의 순간에 내뱉은 발언으로는 적절치 않다는 게 ‘어른들의 생각’이다.
같은 시간. 협회 관계자는 물론 파리에 있던 소속팀 관계자도 ‘연락두절’ 상태였다. 축배를 들고 있었을 수도, 갑작스러운 폭탄발언에 대책회의를 했을 수도 있다. 주변인들의 얘기로는 협회도 크게 당황했고, 선수단 내에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사람 생각이 다 같을 수는 없으니 “터질 게 터졌다” “이런 일이 일어날줄 알았다”는 반응도 없진 않았다. 안세영의 부모도 “(안)세영이가 협회와 잘 얘기해서 풀어야지요”라고만 했다.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타이밍이 안좋다는 건 어른이니까 안다. 직접 뛰는 당사자가 아닌데다 합숙훈련과 대회출전을 반복하는 딸과 대체로 떨어져 지내니, 내밀한 얘기까지 몰랐을 수도 있다.
축제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발언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말씀드리겠다”던 안세영의 출국전 마지막 메시지는 귀국 후 “협회, 소속팀과 얘기한 뒤 말씀드리겠다”로 ‘톤 다운’됐다. 압박이 있었던 건지,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당황한 것인지, 생각과 입장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소속팀 관계자들도 “대표팀 소집 후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말로 연락을 피하기 바빴다.
반대로 협회는 안세영의 짧은 귀국 인터뷰 이후 한 시간가량 흐른 뒤 방대한 분량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코치진 서명까지 넣은 ‘친절한 반박문’이다. 발언 하나하나에 “협회는 최선을 다했다”고 설명했다. 의료진단 기록을 시간대별로 정리하는 성의로 “협회에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강변했다.
오진, 컨디션 관리, 발목부상 은폐시도 등 자극적인 얘기들이 흘러나오던 때여서 협회의 ‘친절한 반박문’은 설득력있는 것처럼 보인다. 코치진 서명까지 포함됐으니, 시각에 따라 안세영이 ‘제 실력만 믿고 오만방자한 행동을 한 것’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 정부여당까지 나서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사건’으로 전환했다는 의미다. 아무리 세계적인 기량을 가진 선수여도 개인이면, 단체와 싸워서 이기기 어렵다. 강한 동지애로 뭉친 체육단체라면, 승률은 0에 수렴한다. 협회와 대표팀은 선수 한 명을 위한 곳이 아니므로, 보편성에 초점을 맞춰 자료를 제출하면 된다. ‘대표팀 일원’이라는 동등한 자격으로 차별없이 대우했다고 주장하면, 반박논거는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실망했다”는 말 한마디가 진실게임으로 변한 셈이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스물두 살의 어린 선수가, 최고 영예인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순간 작심한듯 말 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운동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얘기를 강하게 한 것을 이해해달라”는 안세영의 ‘귀국인터뷰 첫 말’에 답이 있지 않을까. 호도하고 확대재생산하는 미디어의 보도 양태가 이른바 ‘뉴스 당사자’를 더 깊은 굴속으로 몰아넣고 있는건 아닌지. 어쩌면 끝내 28년 만의 올림픽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의 진심을 모른채 사건이 종결되는 건 아닌지. 씁쓸한 뒷맛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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