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1일이면 벚꽃과 함께 돌아오는 이 남자, 1980~90년대 홍콩영화 전성기를 이끈 장국영(장궈룽·1956∼2003)이 세상과 작별한지 20년이 지났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장국영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서서히 사회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의 이름이 낯설다는 MZ세대가 늘고 있다.

그럼에도 장국영의 영화와 젊은 날을 보냈던 이들은 여전히 스크린에 박제된 그의 청춘을 추억한다. 장국영의 시간은 2003년 4월 1일 멈췄지만 그를 향한 팬심은 현재진행형이다.

◇BTS 못지 않았던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

장국영은 1956년 홍콩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말론 브란도, 히치콕 같은 할리우드 거물의 옷을 만드는 유명 재단사였다. 부친의 영향으로 영국 리즈대학에서 섬유를 공부했지만 학업에는 뜻이 없었다. 대신 불완전한 청춘의 세계를 키워나갔다.

중국 반환을 앞둔 영국령 홍콩에서 성장하고 가수와 배우를 병행한 커리어,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양성애적 성향처럼 그의 47년 생애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했다. 불완전과 부유는 청춘의 대표 속성이다. 장국영이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청춘의 표상’으로 기억되는 이유기도 하다.

장국영은 1976년 홍콩 ATV 아시아 뮤직콘테스트에 2위로 입상하며 데뷔했다. 이후 2년 뒤 영화 ‘열화청춘’으로 스크린에 얼굴을 알렸다. 그 시절 대다수 홍콩 배우, 가수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연기와 가수활동을 병행했다.

1980년대 후반은 장국영 전성시대였다.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1986), ‘천녀유혼’(1987)과 더불어 앨범 ‘서머 로맨스’(Summer Romance)의 성공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당대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남성적이고 거친 사내들 속 미소년 같은 외모와 서글픈 눈빛이 세밀한 연기와 어우러져 여심을 뒤흔들었다. 국내에도 6번 내한해 초콜릿 CF를 촬영하기도 했다. 당시 장국영의 인기는 지금의 방탄소년단 못지 않았다.

최고의 인기를 누린 만큼 적도 많았다. 할 말은 하는 솔직한 성격도 한 몫했다. 1989년 천안문 6.4항쟁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응을 비난하고, 중국 최대 폭력조직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을 공개 반대했다가 언론과 척을 졌다.

그해에 장국영 팬과 동료배우 알란 탐 팬이 다투다 한쪽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해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자 장국영은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

◇왕가위의 페르소나로 복귀...만우절 거짓말처럼 떠나

시련에도 장국영은 90년대를 대표하는 연기자로 우뚝 선다. 이전의 커리어가 수려한 외모와 홍콩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쌓은 유명세라면 다시 돌아온 그의 연기세계는 한층 심오한 철학을 자랑했다.

복귀작은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1990)이다. 지금도 유튜브의 ‘밈’으로 종종 회자되는 런닝 셔츠 차림의 장국영이 살랑살랑 맘보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 영화다.

최근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관훈 토론회에서 이 장면을 언급하기도 했다. 극중 주인공 아비로 분한 장국영은 “날개없는 새”, “이 1분 때문에 나는 너를 영원히 기억할 거야” 등 숱한 명대사를 남겼다.

1997년 왕가위 감독과 다시 한 번 손잡고 출연한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동성애자 보영으로 열연했다. 영화가 칸영화제 최우수감독상을 받은 뒤 장국영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양성애자’로 규정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때문에 장국영이 2003년 4월 1일, 홍콩 만다린오리엔탈 호텔에서 몸을 던졌을 때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의 동성 연인 당학덕에게 쏠리기도 했다.

살아있다면 67세, 노년의 삶을 살겠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47세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그를 그리고자 20주기인 올해에도 ‘영화 ’해피투게더‘와 ’패왕별희‘가 이달 30일과 다음달 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장국영은 떠났지만 그의 영화만큼은 영원불멸의 삶을 살고 있다.

mulgae@sportsseoul.com1993년에는 천카이거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의 주연 두지로 분해 열연했다. 영화는 그 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등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25개 부문 수상, 9개 부문 노미네이트 되는 기록을 세웠다. 덩달아 장국영 역시 영어명 ‘레슬리청’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