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그의 이름 뒤에는 ‘이 산타’라는 조롱 섞인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유부남의 추문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힘들다. 보통 배우라면 이미 나락으로 떨어졌을 테지만 이병헌은 달랐다. 그는 영화 ‘내부자들’(2015)의 걸출한 연기에 힘입어 이듬해 대종상 영화제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등 숱한 시상식을 휩쓸었다.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이 연기력으로 추문을 이겨낸 거의 유일한 예다.

9일 개봉한 엄태화 감독의 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이병헌의 연기 역시 입이 쩍 벌어질만큼 감탄이 쏟아져 나온다.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유일하게 남은 ‘황궁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에서 이병헌은 생존을 위해 점차 광기에 사로잡혀가는 입주민 대표 영탁을 연기했다. 신인 엄태화 감독의 빼어난 미장센과 더불어 이병헌의 ‘눈알 갈아 끼운 연기’가 호평을 받으며 개봉직전 외화 ‘오펜하이머’에 이어 예매율 2위까지 치솟았다. 최근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이병헌은 “시사회에서 본 내 눈빛이 CG같았다”며 웃었다.

◇‘내집 마련’ 소시민이 변해가는 모습 탁월하게 표현해내

그가 연기한 영탁은 ‘내 집 마련’이 꿈인 평범한 소시민이다. 사기꾼에게 모든 걸 다 잃은 영탁은 우연한 기회에 황궁아파트의 입주자 대표로 선출된다. 필부였던 영탁은 재난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왕관의 무게를 즐기며 피칠갑을 한 잔혹한 리더로 변해간다.

“영탁은 극단적으로 특이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저 내 집을 마련하는 게 목표지만, 그마저도 사기를 당해 절망한 소시민이죠. 그런데 예상치 못한 신분상승으로 그 사람이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어요. 재난보다 더 무서운 게 인간이니까요.”

영화는 영탁의 심리 변화에 따라 재난물에서 블랙코미디로, 다시 스릴러와 공포로 변해간다. 이병헌은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영탁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나를 설득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며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감정을 토해내며 구역질하는 장면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내가 (대본에)설득 당한 뒤에는 어떻게 표현해야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고 토로했다.

영탁의 내면 외에 외면도 이병헌의 세심한 표현력으로 완성됐다. 그는 영탁 역을 위해 이마가 ‘M자’로 벗겨진 독특한 헤어스타일부터 영탁의 사인하는 습관까지 세심한 부분에 관여했다. 탈모가 오기 직전의 평범한 중년, 재난 속 가꾸지 못한 성게 스타일의 뻗친 헤어 등은 이병헌의 적극적인 아이디어로 성사됐다. 이병헌은 “스태프들은 다들 좋아했지만 팬들은 다 날아갈 것 같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내 이민정과 ‘현실부부’ 케미 보여준 SNS…최근 둘째 임신 겹경사

‘콘크리트 유토피아’ 개봉에 앞서 그는 둘째 임신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의 아내 이민정이 2015년 첫째 아들을 낳은 뒤 8년만에 임신한 것이다. 이민정은 이병헌의 추문에도 그를 감싼 든든한 지원군이다. 이들 부부는 평소 격의없는 SNS활동으로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은 바 있어 더욱 큰 축하를 받고 있다.

“하하 저도 여전히 신비롭고 싶은 배우랍니다. ‘건치댄스’ 밈은 솔직히 충격이었어요. 기왕 나왔고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즐기자고 자기 위안을 할 뿐이죠.”

장시간 연기를 하며 다채로운 작품에 출연한 만큼 연출에 대한 욕심이 생길 법 하지만 그는 “나는 내가 잘하는 것에 오롯이 쏟고 싶다. 두 가지 재능을 지닌 동료들이 부러울 뿐, 연출에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다. 엄두도 안 난다”며 선을 그었다.

이병헌은 황동혁 감독이 연출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 시즌2 출연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공교롭게도 그가 아끼는 빅뱅 탑이 이 시리즈에 출연하면서 ‘이병헌 배후설’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병헌은 “지금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집중할 때니 ‘오징어게임’에 대해서는 답할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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