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천/치과의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던 율리시즈는 많은 어려움에 처한다. 그러던 중 외눈박이 괴물에 잡혀 동굴에 갇힌다. 탈출을 궁리하던 그는 갖고 있던 술을 준다. 처음으로 술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괴물은 더 달라고 난리다.
해서 율리시즈는 부하들과 함께 커다란 통에 포도를 따다 넣고는 모두 들어가 발로 짓이겨 포도주를 만들어 준다. 이를 다 마시고 만취한 괴물은 드러누워 잠이 든다. 이 틈을 타 율리시즈 일행은 미리 끝을 뾰족하게 깎아 놓은 통나무로 괴물의 눈을 찌르고 굴에서 빠져 나온다. 포도주로 살아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율리시즈 이야기다.
이 신화만이 아니더라도 와인은 플레밍의 말처럼 죽음에서도 살아나올 수 있는 생명수이기도 하지만 실패 했을 때는 와인을 마시라는 말처럼 삶의 멘토이기도 하다. 그러니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최고의 술'이라는 찬사가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와인은 사람과 닮아서 사람처럼 살아있고 또 진화해 간다고 한다는 얘기도 건성은 아닌 것이 청춘기에는 풋풋한 향과 맛이 있다가 완숙기에는 균형 잡힌 성숙함으로 왕성하고 퇴색기에는 힘을 잃은 피곤함을 갖는 사이클이 닮아서다.
허나 이런 와인이 제대로 음미하기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느 밭이냐, 어느 생산자이냐 또는 어느 포도종이냐 그리고 어느 해인가 등에 따라 너무도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것도 음식의 종류와 맛에 따라 달리 짝을 지어야하는 와인의 아주 델리케이트한 차이를 알기란 꿈같은 이야기다.
헌데 한국인에게도 저네들의 이런 와인을 능가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김치가 아닐까?
어찌 보면 김치와 와인은 참으로 닮았다. 둘 다 발효식품이란 점도 그렇지만 생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 말고도 닮은 점이 아주 많다. 까다롭고 섬세한 그들의 와인만큼이나 우리의 김치도 어떤 재료냐, 어느 철이냐, 그리고 어느 지방이냐에 따라 가짓수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미묘한 맛과 특징 또한 오묘하지 않은가.
와인이 땅과 기후 그리고 생산자에 따라 다르듯이 우리의 김치도 천,지,인 삼재 더 나아가 무엇보다도 사람의 손맛과 정성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한 부모에서 나온 같은 형제도 같은 삶이 없듯이 김치의 맛도 다 다르고 와인처럼 시간에 따라 숙성해 가며 그 맛 또한 기기묘묘하다.
그런가 하면 수십 년을 두고 숙성시키는 장기 숙성용 보르도 와인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긴 시간을 두고 오래 숙성시키는 묵은지도 있고 숙성시키지 않고 바로 마시는 보졸레 누보와도 같이 막 담가서 금방 먹는 겉절이도 있다.
와인은 김치만큼이나 한국 음식들과도 잘 어울려서 불고기나 갈비에는 까베르네 소비뇽을 주 품종으로 하는 메독와인이, 수육이나 삼겹살 등엔 메를로를 주로 하는 떼밀리옹과 곁들이면 좋다고 한다.
더구나 와인은 김치와도 너무도 잘 어울려 소테른 와인과 김치는 천생궁합이라고 까지 하지만 그래도 김치가 세계 어느 음식과도 어울리는 능력까지는 따라가기 힘들 것이다. 그것은 와인은 거만하고 제 맛을 여는데 시간이 걸리는데 반해 김치는 특출 나지만 오만하지 않고 삶 속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는 여유 있는 심성까지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와인 이야기가 떠 오른 것은 독도 새우 때문이다. 트럼프 국빈만찬에 등장한 독도새우를 두고 일본 언론이 '반일 만찬'이라 비난했고, 관방장관은 '왜 그랬는지 의문'이라며 발끈하면서 '독도 새우'가 유명해졌다. 더구나 일본은 다급한 나머지 '다케시마 새우'라 하지 않고 '독도 새우'라고 했으니 부지불식간에 자승자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암튼 이왕 한-일 역사 문제에 트럼프 대통령이 균형 있는 시각을 가져 달라는 의미로 독도새우를 내 놓았다면 이와 함께 '독도 와인, 799-805'를 올렸었더라면 더욱 금상첨화였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어서다.
2017-11-14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