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를 끌고
김준철
가냘픈 책장은 비어 있고
견고한 상자 속 갇힌 언어들의 비명
창가로 기웃대는 어둠이
또 하나의 하루를 버티고
부어오른 발등을 적실 즈음
입술에 힘을 모은다
문자들이
얄팍한 종이로부터 떨어져 나와
소리가 되고
바람이 된다
뱀의 눈이 달린 바람,
쉬쉬 책장을 넘기고
은밀한 기도문이
두 갈래 빠른 혀를 타고 읽힐 때
그것들은 머리없는 뱀의 몸뚱이로
새벽 기도 같은 나의
수면을 깨운다
새벽이 비어 있다
허기진 서재로 걸음을 옮기면
야원 종아리에
뱀 머리 여럿이 박혀 있다
글은 쓰는 필자에게 책장은 생명과도 같은 장소다. 하지만 가끔 새벽에 깨어나 쓰이지 않는 종이를 앞에 놔두고 있을 때면 한없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날이면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마음에서 일어나던 문장들도 길을 잃은 바람처럼 입 밖에서 모아지지 않고 흩어져 떨어진다.
어지럽기만 한 새벽의 모습이다.
그런 혼란스런 모든 것이 잦아 들 때즈음, 하나의 문장이 내내 허기진 나의 종이 위에 박히든 쓰여지기도 한다.
2023-06-16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