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냉장고는 서늘하다
맥 빠진 성욕처럼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났다
말간 눈빛이 텅 빈 자신의 몸 속을 비추고 있다
채워지지 않은 몸은 얼마나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렸을까
기다린다는 것은 밀폐된 냉기 속에 갇혀 미이라처럼 변하지 못하고 있다
문을 열면 쏟아져 나오는
나는 모르는 나의
말이
내가 없이 너와 또 다른 너 사이에서
또 다른 나를 생산하고 제조하고 판매하고
시시덕거리는 은밀하다고 생각하는 미련한 혓바닥들
단단하게 얼려진 각진 언어들이 비틀,
잔뜩 채워진 냉장고의 허기로
웅웅 새벽이 길어지고 있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텅 비어 냉기만 가득 차 있는 냉장고를 열었을 때 느낀 허기의 기억에서 시작된 필자의 시 ‘빈 냉장고’ 이다.
무언가 충만하고 신선하게 유지되고 보관되었으리라 믿었던 나의 것들이 맑간 냉장고의 작은 전구 빛 아래 텅 빈 불빛으로 흘러나올 때의 허망함은 생각보다 훨씬 큰 내상을 입혔다.
그것은 세상이라는 냉장고 안에서도 같은 느낌이었다.
소리만 요란하게 새벽내내 웅웅거리며 잠을 설치게 만들던 냉장고 같은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어쩌면 그 역시 나이를 먹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한다.
2023-09-21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