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아름다운 약속, 고달픈 삶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맡아 파면을 선고했던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헌법재판관 취임 전인 2019년 인사청문회에서 법조계의 전관예우 문제와 관련해 "퇴임 이후 영리 목적의 변호사 개업 신고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올해 4월 헌재 퇴임 후에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지난달 27일 방송된 MBC '손석희의 질문들' 인터뷰에서도 이 약속을 거듭 확인하면서 그것이 "내 삶을 제약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문 전 재판관은 청문회 당시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아름다운 약속도 했다. 낡은 교복과 교과서일망정 물려받을 친척이 있어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는 그의 가난이 있었기에 약속은 큰 울림을 줬다. 그는 방송 인터뷰 말미에 결국 이런 약속들 때문에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면서 "문장이 아름다우면 생활이 피곤하다"고 했다. 아름다운 약속을 지키려면 삶이 고달프기 마련이다. 사회에서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건 개인의 신념일 수 있지만 가족의 생활은 힘들고 불편해진다.
►사법원 동기의 '다른 길'
지난 6월 이재명 정부의 첫 민정수석으로 임명됐다가 낙마한 오광수 변호사가 김건희 특검(특별검사 민중기)의 수사를 받는 한학자 통일교 총재의 변호인으로 변신했다. 오 변호사는 검사 재직 시 부동산 차명 관리 의혹 등이 불거져 민정수석 임명 닷새 만에 사퇴했다. 새 정부 첫 공직 낙마 사례로 새롭게 출발하는 정부에 적잖은 상처를 줬다. 그는 JTBC에 "변호인들이 많이 계시는 걸로 알고 있다. '원오브뎀(one of them)'이겠지 뭐. 그렇게 이해합시다"라고 입장을 전했다고 한다. 오 변호사는 문 전 재판관과 사법연수원 동기다.
통일교 측 변호인단에는 이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사건 변호를 했던 강찬우 전 대검 반부패부장(옛 중수부장)과 문재인 정부 마지막 검찰총장을 지낸 김오수 변호사 등 검찰 고위직 출신들이 다수 참여했다고 하나 오 변호사가 '전관 중 전관'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불과 3개월 전 민정수석에 기용됐던 그의 경력을 따라올 만한 확실한 전관도 없다. 오 변호사는 한 총재의 변호인 자격으로 특검을 방문했다고 한다. 특검 측은 3일 정례브리핑에서 "오 전 수석이 특검에 방문한 것은 사실"이라며 "담당 특검보를 만나 변론하고 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오 변호사는 민정수석 사퇴 후 지난 7월 25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의 퇴직공직자 취업 심사에서 과거 소속됐던 법무법인에 취업 가능 처분을 받았다. 변호사 활동에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그에게는 직업 선택의 자유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새 정부 초대 민정수석에서 국민적 지탄을 받는 김건희 특검 주요 피의자의 변호인으로 3개월 만에 변신한 그의 처신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변신에 수긍하는 국민이 얼마나 있겠는가,
►궁색한 '무항산 무항심'
그의 변신은 검찰 개혁 문제로도 불똥이 튀었다. 검찰 고위직 출신 변호인들은 통상 검찰 수사단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검찰이 수사권을 가지고 있는 한 이런 전관예우의 악습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힘을 얻는다. 검찰개혁 방안 논의과정에서 검찰이 보완 수사권을 고집하는 것을 검찰 출신들의 전관 혜택 관점에서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법관 시절 '청백리'로 칭송받았던 김능환 전 대법관이 2013년 3월 중앙선관위원장직에서 퇴임한 후 아내의 편의점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의 삶을 선택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5개월 뒤인 그해 8월 대형로펌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는 말을 남겼다. '맹자'에 나오는 말로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경제적 문제가 로펌행의 이유였다는 것이다. 그가 뒤늦게나마 한학자 총재의 변호인에서 사임하긴 했지만 뒤끝이 개운치 않다.
우리 사회의 전관예우 문제는 개인의 도덕성에만 맡길 것이 아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인 만큼 제도적, 문화적인 측면에서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 문형배 전 재판관이 언젠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가족의 안온한 삶을 위해 변호사 개업을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설령 변호사 생활을 하더라도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할 사건은 수임하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