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천/치과의
요즘 광화문에선 주말마다 축제가 열린다. 대낮의 축제가 아니라 깜깜한 밤의 축제다.
'진실의 빛으로 바르게 비추는 문'이라는 광화문(光化門)앞에서 그 문 건너 푸른 궁전에 사는 누군가를 애타게 불러내기 위해서다. 군중들은 프랑스 혁명을 노래한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를 부르며 푸른 궁전으로 향한다. 그러나 백여 미터 앞에다 두고 끝내 만나지 못한다. 오래 전 떠돌던 유행가 가사처럼. '그 사람을 몇 미터 앞에다 두고/나는 말 한마디 끝내 붙일 수 없었다./.../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란 노래 말이다.
오히려 그들의 외침에 되돌아 온 것은 노림수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조소와 함께 '수취인 불명(미스 박)'쪽지가 붙은 '광화문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을 받은 군중들은 저마다 촛불을 들고 나와 함께 노래하고 외친다. 그들이 만든 백만 송이 촛불다발은 지상에 뿌려진 거대한 은하수 같은 불꽃을 이루고 서울의 심장부를 환히 밝힌다.
애당초 저 패거리들의 작당에 군중들은 '잘못된 만남'을 노래하고 그들의 작태에 할 말을 잃어 '억장이 무너지네'를 부른다. 군중들은 이제 잔잔하고 아련한 '광화문 연가'의 추억도 잊었다. 대신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 '광화문 하야가'를 부르며 분노를 삭이고 있다.
다이아나비 왕비를 추모하기 위한 노래 '바람 속의 촛불'은 영국인들에겐 슬픔과 비탄에 빠진 국민을 위로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한국의 군중들에겐 혁신의 염원과 기도송이 되고 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노래와 함께.
광화문이 있는 경복궁 궁궐엔 크고 작은 화재가 자주 일어났다. 이는 궁 정면에 마주하는 관악산 때문으로 생각됐다. 관악산이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어서였다. 헌데 이 불기운을 한강물로만 막기엔 역부족이어서 물짐승인 해태상을 대궐문 앞에 세워 관악산을 바라보게 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남대문의 현판 숭례문(崇禮門)을 다른 문들과는 다르게 세로로 세웠다. 이는 불이 위로 타올라 가는 모양을 흉내 낸 것이고 게다가 숭(崇)자도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 한 모양이어서 겹겹이 불기운을 불로써 제압하려는 예비책이었다. 그리고'왕의 덕을 널리 바르게 펼친다'는 뜻에서 궁궐 정문의 이름을 광화문(光化門)이라 지었다.
그런데 이제 군중들은 작은 촛불을 모아 저 푸른 궁전의 역신과 망령들을 태워 쫓아내려하고 있다. 이러한 군중의 민심은 해태도 어찌 못하고 숭례도 어찌 못하는 가보다. 관악의 불길은 잡았는지는 몰라도 민심의 촛불 불길은 못 잡은 셈이다.
광화(光化)의 예견만 남았다. 광(光)은 사람이 꿇어앉아 불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화(化)는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한 사람이 바르게 된다는 뜻이라 한다.
군중들은 또 노래한다. '잘 가요 미스 박 쎄뇨리따'그리고 '잘 가세요, 잘 있어요. 그 한마디였었네'라는 노래 한 소절이면 족하다고 한다.
과연 이 노래대로 광화(光化)의 부적은 신통력을 발휘할까? 아니면 이마저도 그저 한낱 종이쪽지에 그칠까.
2016-12-05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