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천/치과의
얼마 전 미중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별 성과 없이 끝났다. 헌데 국무장관 말에 의하면 두 정상이 단둘이서 약 1시간 이상 대화를 나누었다한다. 이 때 시 주석이 트럼프에게 한국과 중국의 수천 년 역사적 관계를 설명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아마도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가 고구려를 꺾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을 만큼 한국이 만만치 않은 어려운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정이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라는 거다.
을지문덕 장군에게 살수대첩에서 패한 수나라는 패망하고 이어 들어선 당나라 또한 같은 운명의 길을 겪었다.
여기서 정사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여러 야사나 시가집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가 당(唐) 태종(太宗) 이야기다.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이 쏜 화살에 눈을 맞아 퇴각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는 기록이다.
이야기의 발단은 고려 말 충신 이색(李穡)이다. 이색은 정관음(貞觀音)이라는 시에서 '주머니 속의 물건인 줄 알았으나 어찌 검은 꽃(玄花)이 흰 깃(白羽)에 질 줄 알았으랴'라고 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머니 속 작은 물건은 고구려를 지칭하고 검은 꽃은 당 태종의 눈동자를 뜻하며 흰 깃은 화살을 말하는 거다. 하얀 깃털이 달린 양만춘의 화살이 당 태종 이세민의 검은 눈동자에 박혔단 얘기다.
한 때 한국에서 절찬리에 방영했던 대하 역사드라마들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자 중국인들이 분노했던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 태종은 중국인들이 5000년 역사상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황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관의 치(貞觀之治)'라는 중국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군주로도 평가받는다.
어쨌거나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고 하니 한반도는 중국에게는 어쩌지 못하는 눈에 가시 같았을 게다. 그러나 이런 실명(失明)과 사망 이야기는 중국의 역사서에는 한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짓밟힌 자존심으로 가려진 불편한 진실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소국(小國)으로 보고 걸핏하면 함부로 대하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중국이 과연 쓰라린 과거사를 꺼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트럼프의 압박을 피하는 구실을 찾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까지 들먹였다면 오죽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단 둘만이 얘기하는 공간에서 탈출구의 구실을 찾는 비겁함이 엿보인다. 트럼프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나 국민적 감정까지 피부로 느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중국은 후흑(厚黑)의 대명사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얘기다. 후흑은 두꺼운 얼굴과 시커먼 속마음의 합성어로 대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계략과 술수도 부린다는 말로 처세술이다. 다시 말해 권모술수다.
후흑의 대표적 인물이 삼국지의 유비다. 사정상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유비는 그 앞에서 몸을 낮추고 비굴함을 보이는 데 성공해 탈출한 후 황제에 오른다.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유명한 월 왕 구천 또한 빠지지 않는다. 그는 오나라 왕 부차에게 패하자 부인을 첩으로 바친다. 그러나 20년 후 오 왕과 치른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거했다.
현대로 내려와서는 등소평의 '도광양회'(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속에서 힘을 기른다) 또한 최고의 후흑을 보여준다. 후흑이 반드시 그릇되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뺏고 빼앗기는 약육강식의 국제 외교에서 후흑은 필요할 게다. 그리고 중국은 오늘도 후흑의 민낯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헌데 우리는 어떤가? 사방 주위 승냥이들만이 득실대고 있는 데 비해 우린 너무 순진한 아이들 같아 보기에 위태하고 불안하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고려 장수 서희, 요동정벌을 꿈꾸던 공민왕이나 정도전, 왜인은 단 한 발자국 한반도에 들이지 않겠다고 불호령하던 이순신 장군 같은 선조들의 DNA는 왜 안 보이는 걸까? 설마 누구 말대로 불량 세탁기에 모두 넣고 돌리는 바람에 다 퇴색된 건 아니길.
2017-04-18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