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기원전 3000년부터 오늘날까지 14,500 번의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이는 5,000 년 인류역사 중 92%가 전쟁 중이었고 8%만이 평화였다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서로를 죽이고 죽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중에는 의미 없는 전쟁도 많지만 눈물겨운 전투도 많다. 특히 혹독한 추위 속에 치러진 겨울 전투는 더하다. '전쟁과 평화'의 소재가 된 나폴레옹의 1812년 러시아 침공에서 68만 프랑스 대군은 궤멸되었다. 히틀러가 침공한 모스크바 공방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양국은 400만 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모두 혹독한 러시아의 추운 날씨 때문이었다.
이들 전투와 함께 세계 겨울 전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6·25전쟁의 장진호 전투다. 졌지만 승리했다고 평가 받는 이 전투를 미국은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투' 중 하나로 손꼽는다.
1950년 미 해병 1사단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한국으로 파병되었다.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을 한 후 동해안을 따라 흥남을 거쳐 장진호로 향했다. 그러나 이들 12,000명은 그 해 11월 겨울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저수지 장진호에서 예기치 않은 12 만 명의 중공군에 포위되었다. 자칫 전멸위기에 몰렸지만 어렵사리 포위망을 뚫고 12월 10일 다행히 퇴각에 성공했다.
고려대 서지문 교수는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제임스 브레이디의 '가을의 해병들'을 인용해 이렇게 표현했다.
"얼어붙은 장진호 저수지 때문에 한층 더 견딜 수 없었던 영하 30~40도의 추위 속에서 중공군이 밤에만 몰려와서 잠도 잘 수 없었다. 땅도 바위처럼 얼어 참호를 팔수도 없고, 헬기가 떨어뜨린 보급품도 험한 골짜기에서 끌어올릴 수 없었다. 총신이 얼어 총알이 발사되지 않아 소변으로 녹여서 총을 쏘았다. 옷을 겹겹이 껴입고도 온몸이 떨려 음식을 입에 떠 넣을 수도 없고, 부상을 당하면 피가 바로 얼어버리고, 모르핀 앰풀도 얼어 입에 넣어 녹여서 주사해야 했다. 더욱이 흥남으로 철수할 때는 감각 없는 손으로 옷을 헤칠 수도 없고 맨 살을 내놓을 수도 없어서 그대로 걸으면서 배설도 했다."
이러한 혹독한 추위 속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났지만 12 만명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덕분에 흥남 철수가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목숨을 건진 이들은 흥남으로 모였다. 피난민만 10만이 넘었다.
미군과 국군은 열흘 남짓 200여 척의 배를 동원해 군과 피난민들을 날랐다. 12월 22일이 되자 항구를 폭발시키고 남쪽으로 떠나야 할 상황이 됐다. 이제 남은 배는 항공유 보급을 위해 흥남 부두에 정박했던 화물선 메러디스 한 척뿐이었다. 정원은 60명이었다. 선장은 "배에 실린 물건을 모두 버리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태우라"라고 명령하였다.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300톤의 무기와 화물을 바다에 버리고 정원의 200배가 넘는 14,000명이 배에 올랐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보여 준 눈물겨운 장면이다. 해서 장진호 전투에는'위대한 후퇴'라고도 불린다. 수많은 목숨을 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배를 타고 남하한 많은 인파 속의 한 부부도 거제도에 안착했다. 그리고 3년 뒤 이 부부사에서 태어난 아기는 커서 대통령이 되어 한미정상 회담 차 미국을 방문하고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았다. 그리고 연설을 했다. 기념사를 하는 도중 눈물을 쏟아내는 참전 노병들을 바라보는 인상적인 장면도 연출되었다.
특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당시 항해 도중인 12월24일, 미군들이 피난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사탕을 한 알씩 나눠줬다고 한다"고 했다. 탈출을 하면서도 비록 알사탕 하나이지만 성탄절을 기념하는 미국인의 여유도 엿보인다. 헌데 이 때 미 해병은 중공군의 거센 공세와 싸우면서도 모든 장비는 물론 전사자의 사체까지 모두 운구해 가지고 철수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장에는 전우를 두고 오지 않는다'는 미 해병의 전통에 따라 죽은 이는 트럭에 싣고 산 사람들은 걸어서 후퇴했던 장진호 전투의 해병대는 오늘날에도 세계 최강의 군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모든 이에게 경의와 영광을 바친다.
2017-07-11 04:1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