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확신처럼 갖게된 생각이 있다. 그것은 목소리와 눈빛이다.
눈빛이 한 사람의 타고난 천성을 반영하고 있다면 목소리는 그 사람의 살아온 후천적 삶을 반영한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사람의 얼굴부터 모든것을 바꾸어놓을수 있어도 목소리와 눈빛만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성형도 정형도 불가능한 것이다. 다만 노력에 의해 다소간의 '교정'만 가능할 뿐이다.
한사람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목소리와 눈빛은 결정적이다.
얼마전에 한 지인이 카톡으로 보내준 동영상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한국의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97세의 김형석 교수였다.
무엇보다 까맣게 잊고있었던 그 분이 아직도 계시다는것에 놀랐고 그 정정함에 다시한번 놀랐다.
한국에서 70년대 후반인가 누님의 서가에 꽂혀있던 김교수의 에세이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어린 청춘 내 연애편지의 보고였다.
97세의 김교수는 비록 왜소한 노구로 스튜디오에 서있었지만 목소리는 낭랑했고 눈빛은 온화했다.
여전히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나눌수 있을것만 같은∥
눈빛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낙천적인 눈,불만스런 눈,다정한 눈,짜증스런 눈…충직한 눈,배신의 눈,열정에 가득찬 눈,절망적인 눈…
그것은 동물도 마찬가지다.
충직한 소의 눈은 모든것을 다 바치는 '헌신' 그 자체다. 오죽하면 한자의 '犧牲(희생)'이란 단어가 소 '牛(우)'자 변을 달고 있을까.
반면에 뱀의 눈은 어떤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다른 것이다.
목소리는 그냥 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말을 하는 것도 있지만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때의 태도, 대화할때의 톤이라든지 사용하는 어휘…이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그 사람을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그 속에 그 사람이 살아온 문화적 환경, 정신적 정서적 광장과 지적 토대가 느껴지는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나 한국의 홍준표 대표가 '막말'때문에 손해를 보고있거나, 이미 손해를 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급사회로 갈수록 말의 중요함은 더욱 강조된다. 좋은 말을 듣는것은 우리의 영혼을 정화한다.
힘들고 지칠때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G단조'를 듣는것처럼 우리 마음을 적신다.
대부분이 각박한 영혼의 사막같은 삶을 살고있는 이민사회에서 좋은 대화를 나눌수 있는 누군가가 주변에 있다면 그것은 몇십만불보다 더 감사해야 할 일이다.
스웨덴과 월드컵 1차전이 있던 어제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한국의 지인들이 '답답해서 못보겠다' '손흥민을 차라리 빼야한다' 새벽부터 카톡에 불이 났다. 후반전에 비디오판독으로 페널티킥을 받고나서는 아예 카톡보기를 포기했다.
유난히도 축구를 좋아하는 지인들로부터 어제 '좋은 말'을 듣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월드컵 무대에서 기대하는 좋은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닌것 같다.
멕시코전에서는 삶에 청량제가 될 '좋은 말'을 들을수 있을까.
2018-06-18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