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정처없이 일요일의 오후를 서성거렸다. 윌셔길 마당몰에 있는 알라딘서점에서 새로 나온 책이 있나 보러 가봤다. 모차르트의 엘비라 마디간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서점의 창밖으로 비치는 오후의 하늘은 투명하게 빛나면서도 조각구름 몇개를 올려놓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는 서점에서는 조용히해야 한다며 입에다 검지 손가락을 갖다댔고 아이는 숨을 죽이고 까치발로 걸었다.
모처럼 스탕달의 '적과 흙'을 뒤적이며 읽다가 '목적을 원하는 자는 수단을 원한다'며 죽어갔던 줄리앙 소렐이 떠오른다. 평민의 신분으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나폴레옹처럼 신분 상승의 꿈을 꾸었던 줄리앙 소렐은 정작 높은 신분에 있었던 레날 부인의 지순한 사랑을 죽음을 앞두고서야 깨닫는다.
사랑은 인간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수가 없다. 그리하여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조시마 장로를 통해 '인간에게 있어서 지옥이란 사랑할수 없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종이냄새나는 서점에서는 이러한 생각들이 자유롭게 떠오른다.
건너편에서는 막 영화가 끝났는지 한인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일부는 빙수를 들고 일부는 아이스커피를 들고 재잘거리며 흩어진다.
3층 바깥으로 나와 밑의 자그만 광장을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부지런히 어디론가 오가고 있다. 비만 온다면 '쉘부르의 우산'처럼 정겨울수도 있었을 그러한 정경이다.
나머지 한곳의 서점 세종문고가 있는 올림픽 갤러리아로 이동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쉬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얼마전 코리아타운 데일리 신문에서 한인타운에 서점이 이제 두 곳밖에 남지 않았다는 기사가 아프게 떠올랐다.
마당몰의 알라딘 서점과 코리아타운 갤러리아의 세종문고가 한인타운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그립지만 사라져가는 것들이 너무 많으며 서점은 바로 그러한 것중의 하나다.
인터넷은 현대사회의 메뚜기떼 같다.
사람들이 있어야할 일자리를 비롯해 하나하나 소중한 것들을 먹어치우면서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다.
세종문고가 있는 갤러리아 3층에서는 마침 푸드코트에 꽉 찬 한인들이 다저스 류현진의 게임을 관람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탄식도 하며 시켜놓은 음식은 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양복을 입은 머리가 희끗한 노인들부터 삼사십대 중장년과 청년들까지 다양한 한인들이 TV모니터에 눈길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었다.
지금 한국사회와 한인사회를 갈라놓고 있는 극단적인 이념대립을 생각하면 그 모습은 차라리 희화적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인타운에 이러한 공간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중에 2세들이 조국의 정겨움을 느낄수 있는 이러한 공간이 있는 것과 고아처럼 한국의 느낌도 볼수 없는 곳에서 사는 것과 비교하면 한인타운의 존재는 정말 고맙기만 하다.
2019-06-18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