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은 호랑이의 가죽처럼 값비싼 물질보다 세상에 남기는 명예를 더 소중히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명예를 얻기 위해서 필요이상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이름은 고사하고 글자 하나 남기지 않은 비석을 통해서 훌륭한 명예를 남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비문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은 비석을 가리켜서 '백비 (白碑)'라 합니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는 조선 시대 청백리로 이름난 박수량의 백비가 있습니다. 그는 전라도 관찰사 등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죽은 후 그의 상여를 메고 고향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이에 크게 감동한 명종이 암석 하나를 하사하면서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도록 명하여 '백비(白碑)'가 세워졌다 합니다. 박수량의 청백을 알면서 새삼스럽게 이를 비문에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명종은 이와 같이 돌에 새길 비문 대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박수량의 뜻을 깊이 새겨 후세에 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헛된 명예에 사로잡혀서 탐욕스러울 정도로 명예를 좇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명예는 자신의 힘으로 얻어서 자신의 인생에 담아둘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통해서 평가 받고 드러날 때 그 명예가 온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비쳐지는 모습 그대로 명예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세상에서 영예롭게 사는 가장 위대한 길은 우리가 표방하는 모습이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기억되는 명예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기 이전에 백비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2020-06-11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