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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석의 동서남북

수필가, 목사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

    캘리포니아는 나무에 관한 3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코야 국립공원의 가장 부피가 큰 나무, 레드우드 국립공원의 가장 키가 큰 나무, 의 가장 오래된 소나무가 그것들입니다. 그 중에도 슐만의 숲에서 자라는 가장 오래된 소나무 브리슬콘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애리조나 대학의 슐만이라는 학자가 이곳에 사는 나무들의 나이를 연구하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해발 3,000m 이상의 고지대에서 자생하는 브리슬콘 소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약 4800여 년 동안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환경을 관찰해보니 나무가 자라기에 참으로 열악한 것이었습니다. 혹한의 추운 날씨와 사나운 바람, 적은 강수량 등 가장 나쁜 생존조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생각해볼 때 이처럼 열악한 환경이 아니었더라면 나무가 그렇게 강해질 수 없었습니다. 좋은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열악한 주변 환경이 나무를 장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생살이에 있어서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삶이 편안한 위치에 있을 때보다는 어렵고 힘든 환경에 있을 때 그만큼 인생의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좌절한 일이 있습니까? 자연이 교훈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이러한 환경을 통해서 단련되어질 수 있습니다. 힘든 시련을 이겨내고 열악한 환경을 잘 헤쳐 나간다면 한 걸음 한 걸음 더 성장하게 되고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길을 통과한 광석이 정금으로 바뀌는 것처럼 고난의 아픔을 견뎌낸 사람이 그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어려워도 좌절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가장 오래된 브리슬콘 소나무가 열악한 환경을 견뎌냄으로 장수할 수 있었듯이 환경을 초월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이란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

    미국이 낳은 희극배우 밥 호프는 젊은 시절 이름 없는 권투선수로 생활했습니다. 가난하게 살아갔지만 현실에 비관하지 않고 도전하여 미국 최고의 배우가 되었습니다.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해리 트루먼은 농장에서 일하다가 결혼 후 남성복가게를 열었지만 얼마 못되어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법률학교에 진학해 판사가 된 후에 끊임없는 노력 끝에 부통령을 거쳐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음악천재 슈베르트는 피아노도 없었고 건강이 좋지 않아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가 남긴 곡은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보듯이 빛으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할 곳은 어둠의 터널입니다. 때로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고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지만 이처럼 인생의 터널을 지나온 사람들이 삶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터널에 갇힐 수도 있지만 이러한 환경에 갇혀서 포기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터널 안에 갇혀서 방황하지 말고 터널을 뚫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힘과 용기를 통해서 어둠의 시련을 통과하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빛과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이를 포기한 사람이 패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눈앞에 새까만 터널이 자리 잡고 있다 할지라도 이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인생길에 찾아오는 어둠의 터널은 우리를 한 단계 성숙시키기 원하는 하나님의 중요한 계획입니다. 어둠에 갇혀서 움츠리고 있는 사람은 그분의 계획을 경험할 기회조차도 얻을 수 없습니다. 삶에 길이 막혀서 더 이상 갈 곳을 모르고 있다면 인생의 창조주가 되시는 주님께 답을 구해야 합니다. 인생에 찾아오는 어둠의 세력은 빛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으며 이러한 빛을 보기 원한다면 반드시 어둠의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 1만 시간의 법칙

    캐나다의 작가 Malcolm Gladwell은 Outliers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좋은 환경에 있을지라도 꾸준한 자기 노력을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일만 시간을 투자하면 자신이 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1만 시간의 법칙입니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아이들을 종합 평가한 내용입니다. 1만 시간을 채운 사람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고 팔천 시간을 채운 사람은 아마추어의 실력자가 되었으며 사천 시간을 채우면 보통의 음악 선생 수준으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1만 시간의 법칙에 따르는 원리는 사람이 자신이 추구하는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좋은 재능과 환경뿐 아니라 지속적인 훈련을 이루고 절망적인 한계 상황까지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좋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훈련을 견뎌내지 못하여 주저앉게 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추구하는 일에 대해서 권태를 느끼는 가운데 포기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이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그만큼 피나는 훈련은 물론 끝까지 견뎌내는 인내심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에서 이겨내는 사람이 그 분야에서 정상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견디어 나갈 때 어느 순간에 실력이 쭉 올라가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팁핑 포인트(Tipping point)'라고합니다. 이는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임계점의 현상과 같은데 한 순간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여러 반복되는 훈련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자신의 재능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볼 일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은 자신이 추구하는 분야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마다 깊이 새겨들을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 가치를 아는 삶

    어느 추운 겨울 날 런던의 한 악기상에 낡은 바이올린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주인을 보더니 가지고 있던 악기를 사달라고 하면서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발 이 바이올린을 사주세요. 무엇이든지 사먹어야 하니 얼마라도 주세요." 값어치가 없는 악기로 생각한 주인은 그에게 적선을 한다고 생각하고 바이올린을 단돈 5달러에 샀습니다. 그런데 불을 켜고 먼지로 뒤 덮인 바이올린을 살펴본 그는 이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악기에는 다름이 아니라 'Antonio Stradivari 1704'이라는 기절할만한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사라져서 많은 사람들이 찾으려 했던 거장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이었던 것입니다. 값으로는 도저히 따질 수 없는 대단한 가치를 지닌 물건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가 대가로 받았던 돈 5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급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귀한 것의 가치를 모르고 지낼 때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더없이 귀한데 그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돈으로 평가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물의 가치를 깨달아 아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교훈해 줍니다. 주변에 보면 삶의 절박함을 극복하고 인생에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이러한 절박함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함으로써 인생에 실패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절박한 환경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절박한 환경은 누구든지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한 번 더 살펴볼 수 있다면 실패보다 성공에 이를 확률이 훨씬 더하게 됩니다. 비록 당장은 삶이 힘들다 할지라도 인생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을 피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리더와 보스

    다같이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지만 리더와 보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습니다. 리더는 모두를 아우를 줄 아는 통합형인데 비해서 보스는 구성원에게 군림하기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더는 '우리'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지만 보스는 오직 '나'를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정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리더가 대중에게 자발적인 호응을 얻는데 비해서 보스는 강압적인 복종을 기대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리더쉽은 귀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보스가 아니라 리더의 역할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만 데리고 밀실에서 일을 한 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장소에서 손수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을 따르도록 이끌었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얼마든지 명령이나 지시만으로 통솔할 수도 있었지만 말과 행동으로 본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만일 가까운 사람들과만 상대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보스로 군림했다면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를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세상에 있는 어떠한 조직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리더쉽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를 섬기고 아우르는 리더쉽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업장에서 고용주는 종업원의 보스가 아니라 리더의 위치에 서주어야 합니다. 정직하고 겸손하게 섬김으로서 고용주와 고용인이 하나 되는 사업체를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군림하기 좋아하는 고용주는 보스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리더가 되지는 못합니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을 떠나서 먼저 섬길 수 있을 때 그들에게 섬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 걸림돌이 되는 보스보다는 섬기고 돕는 리더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이세돌과 알파고

    인공 지능이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지능을 기계를 통해서 이루는 학문이나 기술입니다. 요사이 인공 지능과 인간 사이의 바둑대결이 단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실 인공 지능도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부산물이기에 이러한 기계와 인간이 경쟁을 한다는 자체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한 페러디를 통해서 보듯이 이는 수많은 컴퓨터로 무장한 기계와 커피의 맛을 느낄 줄 아는 한 인간의 고독한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상할 수 있었듯이 바둑 천재로 불리는 이세돌은 인공지능인 '알파고(AlphaGo)'를 상대로 어렵고 힘든 경기를 펼쳤습니다. 바둑 용어 가운데 공피고아 (攻彼顧我)가 있는데 상대방을 공격 하면서 나를 다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처럼 예와 도를 지키면서 인간의 한계에 도전했지만 무기력하게 3연패를 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인간사회를 대표하고 있다는 중압감이 그의 창의성을 흔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쌍방의 정보가 균형 있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논란 중에도 그는 변명하기 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습니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 믿었던 직관과 통찰이 알파고의 무한대에 가까운 수읽기에 몰리자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도 생겨났습니다. 알파고를 가리켜서 천재지능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번 일을 보면서 인간이 천재지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그날이 도래했다는 섬짓한 생각을 해봅니다. 평소 게임을 즐긴다는 이세돌이 이러한 대결을 받아들인 것은 승부에 대한 인간의 본능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에 의한 그리고 인간을 위한 바둑을 두었는데 꾸임이 없는 진짜실력을 보여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세돌이야말로 천재지능을 가진 창조적인 알파고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기계가 보여줄 수 없는 불굴의 투혼과 더불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 "언제 밥 한번 먹자"

    "조만간에 밥 한번 먹자" "나중에 전화할게" 우리 사회에는 특별한 약속이 있는데 약속은 약속이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들입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지만 이러한 약속 때문에 누군가는 낭패를 당하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처럼 우리 사회에 확실치 않은 약속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현실을 생각해봅니다. 지키지 못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오늘날 약속을 하기는 쉬워도 이를 지키기는 쉽지 않은 현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약속을 하기 전에 이를 지킬 수 있을지 충분히 생각해보는 자세를 필요로 합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가 신용을 잃어버리고 상대방을 언짢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약속 하나를 어김으로서 상대방과의 관계에 금이 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이와 같은 경험을 반복하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악순환의 현실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이에 자신이 했던 약속들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면 아름다운 약속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약속이란 개인이나 조직을 막론하고 지켜질 수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한번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 가운데 불신만이 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신이 계속되다 보면 나중에는 콩으로 메주를 쓰는 당연한 일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특히 공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약속 지키기를 생명과 같이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약속을 남발하고 이를 적당히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내뱉은 공약을 지키지 않을 때 표를 통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 인간만사 '새옹지마'

    한 농부가 큰 맘 먹고 재산의 반을 처분해서 말 한 필을 샀는데 이 말이 얼마 되지 않아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이 일이 불행한 일인지 어찌 알 수 있겠소"하면서 이를 태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얼마 후에 도망갔던 말이 값비싼 종마를 데리고 돌아오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한마디씩 했습니다. "복이 넝쿨째 들어왔네요." 농부는 "이 일이 복인지 어찌 알겠소"하면서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며칠 후 종마를 길들이던 아들이 말의 뒷발에 차여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다시 위로를 했지만 농부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그 후 전쟁이 일어나자 건장한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끌려갔으나 다친 아들은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눈앞에 찾아온 불행으로 인해서 인생의 끝이라도 경험한 것처럼 생각하며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자신에게 찾아 온 행운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자만하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일어난 일의 끝을 알 수 없기에 행과 불행을 따라서 안주할 이유가 없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화가 변화여 복이 될 수 있습니다. 당장 보기에는 어렵고 힘들 것 같은 일도 나중에는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사 성어 가운데 인간만사 새옹지마 (人間萬事 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새옹지마와 같으니 눈앞에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 너무 연연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그 자체만으로 얘기할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삶에 찾아오는 행운에 대해서 교만하지 않고 불행을 보면서 낙심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이나 슬픔도 삶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길에 나타나는 모든 일이 창조주의 뜻 안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당신은 준비돼 있습니까?"

    미국에 와서 접하는 문화적인 차이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묘지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묘지라기보다 공원처럼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묻혀있는 그곳에 가서 책을 읽거나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묘지를 돌면서 묘비에 적힌 글을 읽었습니다. 어느 묘지 앞에 한참을 서 있는데 묘비에 적혀있는 글이 너무나도 흥미로웠다고 합니다. 묘비에는 세 줄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소" 그는 그 첫번째 글을 접하는 순간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그 다음의 글은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웃고 있었소"라고 써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웃음을 멈춘 채 다음 줄에 적힌 글을 조심스럽게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하시오" 이 글을 읽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진정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답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이는 인류 역사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품어왔을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접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좀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처럼 힘쓰고 애쓰는 일들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죽음이라는 고지를 향해서 한걸음씩 나가고 있습니다. 조금은 언짢게 들릴지 몰라도 각자의 죽음을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당신은 죽음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한번 묻고 싶습니다.


  • '무자식 상팔자'의 함정

    한국에서 여성 한 명이 출산하는 자녀수는 2005년 말 기준으로 1.08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OECD 국가는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에 해당합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현재의 인구를 유지하려면 출산율이 적어도 2명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어떤 특단의 조치와 자녀출산에 대한 획기적인 의식의 변화가 없이는 인구감소 국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어쩌다 우리가 인구감소를 걱정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여성들의 의식변화에서 주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갖는 것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이 편의주의를 좇아서 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혼한 여성들 가운데 자녀를 갖는 것을 짐이나 부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특별히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자녀 갖기를 꺼린다는 것입니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얘기도 있지만 상팔자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자녀가 없는 인생을 선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으로서 결혼한 사람으로서 자녀를 갖지 않는 것이 인생의 취향이 되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는 것이 짜장면이나 짬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듯 취사선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분명 가정의 기업인데 결혼을 하고도 자녀를 갖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정에 주시는 축복과 관계없이 살아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네 명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이라는 한국에서 저 출산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기적인 편의를 쫓아서 자녀 갖기를 포기한 여성들마다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정과 자녀에 대한 참된 가치관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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