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몸로비? …'21세기판 마타하리'

[이슈분석]

공화당 컨설턴트와 동거, "미인계로 미국보수 정계 접근”
토르신 러 중앙은행 총재 배후…수사 확대 美 정가 긴장

2016년 8월.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27세 러시아 여성 마리아 부티나가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9월부터 워싱턴의 아메리칸대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수강해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행적은 보통 학생과는 달랐다. 동거인은 나이가 2배는 많은 미국 남성이었고, 러시아의 고위 관료와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미국 FBI는 미·러 정상회담 하루 전인 지난 15일그녀를 간첩 혐의로 전격 체포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성로비까지 마다치 않은 그녀에게 '21세기판 마타하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트럼프 장남과도 만나

언론에 따르면 부티나의 고향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아버지한테 사냥하는 법을 배우며 자라 총을 다루는 데 익숙했다. 속옷 차림에 총기를 들고 찍은 화보 사진이 패션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2011년엔 러시아판 총기협회(NRA·총기 옹호단체)인 '무기를 소지할 권리(Right to Bear Arms)'를 설립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 신흥 재벌이자 중앙은행 부총재인 알렉산드라 토르신의 눈에 들었다. 토르신은 푸틴의 최측근으로 지난 4월 미 재무부의 제재 대상에 올랐다.

부티나는 토르신을 멘토로 여겼다. 미국에서 열리는 NRA 행사를 함께 찾았고, 이 자리에서 공화당 의원들을 소개받았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행사에 NRA 회원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토르신과 그녀가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와 한 테이블을 쓰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2016년 미 대선 국면이 시작되면서부터 부티나는 본격적으로 대선 후보에게 연줄을 대고자 했다. 미국으로 건너온 그녀는 2013년 NRA 행사에서 알게된 공화당 정치 컨설턴트이자 56세 남성 폴 에릭슨과 동거를 시작했다. 에릭슨은 부티나를 도와 트럼프가 대선 후보 시절 '크렘린 커넥션'이라는 이름으로 트럼프와 푸틴의 만남을 추진한 장본인이다.

▶변호사측 "혐의 과장됐다"

그녀의 '미인계'는 에릭슨에 그치지 않았다. 부티나는 특정 이익 단체에 들어가는 대가로 또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했다. 신원미상의 이 남성은 미 정치권 유력 인사들과 부티나, 러시아 정부 인사들 간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부티나의 미국 활동은 거침이 없었다. 지난해 1월 트럼프 취임식 때는 행사장 근처에서 자신의 사진을 찍어 토르신에게 보냈다.

FBI는 지난 3월 부티나가 정보 요원으로 의심되는 러시아의 한 외교관과 저녁 식사를 하는 사진을 입수한 뒤 부티나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부티나의 집을 찾았을 때는 그녀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서 일자리를 제안받았다는 내용과 주요 요원으로 의심되는 인물들의 연락처를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녀는 집의 이삿짐을 모두 싸둔 상태였다.

부티나와 그의 변호사는 모든 혐의가 과장됐다고 주장했지만, 17일 법원은 도주 우려가 높다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가석방 없이 구금할 것을 명령했다. 부티나뿐 아니라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해 미 정계로 수사가 확대될 전망이다.

마리아 부티나가 2015년 미국의 한 총기 행사장에서 총을 쥔 채 웃고 있다.
최근 간첩 혐의로 미국 수사 당국에 체포된 러시아 여성 마리아 부티나(오른쪽)가 미국 워싱턴 DC의 한 식당에서 러시아 정보 당국 관계자로 추정되는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미 FBI(연방수사국)는 18일 이 사진을 공개하면서 부티나가 만난 인물의 얼굴은 하얗게 처리해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