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취재부 이지연 기자

"땡그랑 땡그랑"

지난주 한 한인 마켓에 갔다가 문 앞에서 마주 친 구세군 자선 냄비, 한층 쌀쌀해진 날씨 때문일까. 종소리를 울리는 자원봉사자의 구세군 복장이 정겹게 다가왔다. 

자선 냄비를 처음 본건 20년전 한국에서였다. 눈 내리는 명동, 어렸던 나는 엄마 손을 꼭 잡고 길을 걷다가 빨간 냄비와 마주쳤다. 그 옆에 서서 종을 울리던 아저씨는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자선냄비 속에 몇장의 지폐를 집어넣은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자선냄비는 1년에 한번 연말 종소리가 울릴 때 생각날 법 한 대수롭지 않은 존재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면 마음이 쓰인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189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탄생했다. 당시 갑작스런 재난을 당해 슬픈 성탄을 맞이하게 된 빈민들의 끼니를 마련하기 위해 한 구세군 사관이 쇠솥을 내걸고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 라고 적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냄비엔 어려운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충분한 기금이 모였다. 이웃을 도우려 고민하던 사관의 마음이 자선냄비의 시초가 된 것이다. 

팬데믹으로 얼룩진 올해 자선냄비는 그 어느때보다 특별하다. 코로나19가 점차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오미크론 변이의 등장에 연말은 그 어느때보다 삭막하다.

수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고, 장사가 안돼 가게를 닫은 업주도 부지기수다. 정부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

세월이 어수선 하다 보니 '연말연시 불우이웃을 돕자'는 말이 무색할 만큼 세상은 코로나19의 깊은 늪에 빠져있다. 탈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힘들 때 주변을 둘러보기란 여간 쉽지 않다.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어려움도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미사여구는 남들 얘기다.

구세군 나성교회 이주철 사관에 따르면 자선냄비 모금액은 작년과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 사관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예년처럼 큰 액수를 선뜻 내주시던 기부자들의 손길이 사라졌다"며 "본격적인 연말시즌에 접어들면서 온정의 손길이 몰리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말이 되면 언론에서 익명의 기부자가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거금을 내놨다는 따뜻한 소식을 종종 전해 듣는다. 한번쯤 그 익명의 누군가를 상상하며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우리도 그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1년에 단 한번 자선냄비를 통해 '얼굴없는 기부자'가 되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 모임이나 쇼핑 등으로 들뜬 연말에 전혀 생각지 못한 짜릿한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거금이 아니어도 괜찮다. 나의 작은 손길이 누군가에겐 삶의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