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로 휴가 여행가서 일하고, LA 딸 보러가서 일하고…"

[에프터 코로나19/달라진 일터2]

근무 시스템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직장=매일 출근하는 곳'이라는 개념이 약해지면서 어디서 일하느냐보다는 업무 효율성과 생산성을 우선 따지는 성과주의가 우선시되는 세상이 돼가고 있다. 전통적인 일터의 해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특히 세계적인 빅테크 기업과 이를 지향하는 스타트업이 몰려 있어, 첨단기술의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북가주 실리콘밸리에선 이러한 트렌드가 '뉴노멀'이 돼가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달라진 근무형태와 직장문화의 실태를 4차례에 걸쳐 분석한다. <편집자주>

"전 세계 어디서든지 여행다니면서 일해"
구글·애플, 1년에 4주간 해외 근무 허용

인터넷만 해결되면 바로 그곳이 사무실
원격으로 회사와 협업 앱 출시도 잇따라

"회사출근 각자 알아서 하라"가 회사 방침
장기간 출근안해도 휴가 따로 낼 필요없어

"어디서 일하느냐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아 
 얼마나 성과를 제대로 내는가 더 중요”

"이제 어디서 일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디서 일하든 성과를 제대로 내는 것이 중요하죠."

실리콘밸리에 있는 테크기업 델에 근무하는 김 모씨는 집 근처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일어나자마자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씻은 다음 향하는 곳은 회사가 아니라 집 차고다. 차고에는 '간이 사무실'이 마련돼 있다.

코로나19로 갑자기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방이 부족한 탓에 차고에 컴퓨터와 책상을 넣고 급하게 일할 공간을 만들었다.

그는 "코로나19 전에는 매일 회사에 나갔는데 코로나19가 확산하던 2020년 3월 매니저가 '지금 당장 집에 가서 일하라'고 했다"며 "한 달이면 될 줄 알았는데 벌써 2년 7개월이 됐다"고 했다.

처음에는 재택 근무가 어색했지만,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줌을 통해 팀 회의에 참여하고 팀 메신저를 통해 동료들과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회사에는 팀 회의가 있는 목요일에 주로 간다.

▶코로나19 기업환경 대변화
"회사 방침이라고 하면 각자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일주일에 몇번 나오라는 것은 없다. 암묵적으로 목요일에 얼굴 한번 보자는 정도"라고 그는 귀띔했다.

회사에 나가지 않는 날 집이 유일한 업무공간은 아니다. 피트니스센터가 조용할 때면 센터에서 일하기도 하고 심지어 여행을 다니면서 일을 하기도 한다.

지난달에는 시애틀에 갔다. 회사 출장도 아니고 휴가를 떠난 것도, 공휴일도 아니었다. 아내와 함께 주말을 끼고 3박 4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목요일 아침 일찍 시애틀로 떠난 그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꺼내 들고 금요일까지 호텔에서 일을 했다.

자신은 일하는 동안 아내는 시내를 구경 다녔고, 김 씨는 일을 끝낸 뒤 주말 이틀간 아내와 함께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애틀까지 거리는 서울-부산 거리의 약 3배다.

이달 초에는 딸을 보기 위해 LA에 갔다. 호텔에서 일을 다 마치고 난 뒤 오랜만에 만난 딸과 저녁 시간을 보냈다.

김 씨는 "회사에 안 나가더라도 메신저, 메일, 줌 등을 통해 업무는 다 해결할 수 있다"며 "시간을 그만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회사는 필요할때만 간다"
또 다른 테크기업에 다니는 이모 씨는 조만간 한 달간 일정으로 한국에 간다.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한 달 동안 실리콘밸리를 떠나 있지만, 김 씨는 휴가를 내지 않아도 된다. 회사 방침에 따라 1년 중 한 달간은 해외에 나가서도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낮과 밤이 뒤바뀐 '올빼미 생활'을 해야 하는 건 걱정되지만 코로나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차량 공유 서비스업체 리프트에 다니는 박모씨는 현재 본사에서 한참 떨어진 LA에서 살고 있다. LA에서 회사까지는 약 400마일(640㎞)로, 비행기로만 1시간30분가량 걸린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회사 근처에 살다가 코로나19가 확산하던 2020년 7월 LA로 이사를 했다. 당시 코로나19로 출근하지 않아도 됐고 LA가 코로나19 규제가 덜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그는 계속 LA에 살면서 일을 한다.

그는 "코로나19 기간에는 한 번도 출근하지 않았고 최근에야 한 달에 일주일가량 회사에 나간다"며 "회사가 출근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필요에 의해 갈 뿐"이라고 했다.

이런 풍경은 실리콘밸리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터 진화' 기술적 뒷받침 
대부분의 빅테크 기업이 '오피스'와 '집'에서 근무를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근무를 하지만, '재택근무'(work from home)의 공간은 단순히 '집'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김씨처럼 일할 수 있는 준비만 갖춘 곳이면 어디든 '간이 사무실'이 된다.

그는 "한국에서는 '재택근무'라고 하지만, 적어도 실리콘밸리에서는 '원격근무'(remote work)라고 한다"고 말했다.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의미다.

김 씨와 같이 해외에 나가서 근무할 수 있는 제도는 코로나19 방역규제가 풀리면서 많은 빅테크 기업이 도입했다.

구글과 애플은 올해부터 직원들이 1년간 4주간은 해외 어디서나 근무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기간은 다르지만 메타와 아마존 역시 마찬가지다.

'일터의 진화'를 지원하는 기술적 뒷받침도 이어지고 있다.

원격으로 회사 동료간 협업을 할 수 있는 툴은 이미 시장에 많이 나왔고, 최근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하이브리드 직장인에게 언제 출근하는 것이 적합한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앱을 공개하기도 했다.

회의 내용을 요약해 주는 앱도 내년 2월부터 나온다. 자신이 참석하지 않은 회의의 내용을 요약해 나중에 볼 수 있도록 하는 앱이다.

이처럼 하이브리드 근무에 대한 현실적 수요와 기술적 뒷받침이 이어지면서 직장의 대변신은 가속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