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앤드루 존슨 이어 클린턴·트럼프는 '탄핵 심판대'

그랜트·닉슨·레이건은 측근들만 사법처리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맨해튼의 대배심에 의해 기소되면서 전현직을 통틀어 미국 대통령이 형사범죄로 기소된 사상 첫 사례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가 법적·윤리적 스캔들에 휘말린 최초의 미국 대통령인 것은 아니다.

트럼프의 전임자들 중에는 측근 인사들이 기소되고 대통령 본인도 의혹의 대상이 된 경우가 여럿 있었다.

형사재판과는 별개지만, 현직 대통령이 탄핵재판에 오른 사례도 4차례 있었다. 앤드루 존슨(1865∼1869년 재임)이 1869년에, 빌 클린턴(1993∼2001년 재임)이 1998년에, 트럼프(2017∼2021년 재임)가 2019년과 2021년에 각각 탄핵소추됐다. 다만 탄핵재판으로 미국 대통령이 파면된 사례는 아직 없다.

AP통신은 트럼프 기소를 계기로 이들과 로널드 레이건(1981∼1989년 재임), 리처드 닉슨(1969∼1974년 재임), 율리시스 그랜트(1869∼1877년 재임) 등 미국 대통령들의 대형 스캔들을 소개했다.

◇ 빌 클린턴

빌 클린턴은 실패한 부동산 거래부터 백악관 인턴과의 불륜까지 다양한 스캔들로 조사를 받느라 대통령 재직 기간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

화이트워터 부동산거래 의혹에 대한 수사는 오래 계속됐다. 1994년 임명된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팀의 수사에서는 빌·힐러리 클린턴 부부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대통령 부부는 무혐의 처리됐다.

다만 이들과 가까운 사이였던 짐·수전 맥두걸 부부는 화이트워터와 관련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빌 클린턴의 후임으로 아칸소 주지사가 된 짐 가이 터커에 대해서도 유죄판결이 났다.

빌 클린턴과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에 관해 적나라한 묘사가 들어 있던 스타 특별검사의 1998년 수사보고서는 클린턴에게 타격이 훨씬 더 컸다.

전 아칸소주 공무원 폴라 존스가 낸 성적 괴롭힘 소송의 신문 과정에서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성적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고 부인했으며, 스타는 클린턴의 이런 거짓말이 위증과 사법방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계기로 1998년 12월 19일 연방하원에서 탄핵소추안이 의결됐으나 그 후 상원 탄핵재판에서 기각 결정이 났고, 클린턴은 2001년 1월까지 예정된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 로널드 레이건

레이건 재직 기간의 가장 큰 스캔들은 '이란-콘트라' 사건이었다. 레이건 본인은 탄핵이나 형사소추를 당하지 않았으나, 백악관을 떠난지 한참 후까지도 이 사건에 시달렸다.

레이건 행정부가 레바논에 억류된 미국인 인질 석방을 위해 이란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란에 대한 비밀 무기 판매를 승인했다는 사실이 레이건의 재선 임기 도중인 1986년에 폭로됐다.

게다가 이 무기 판매 대금 중 3천만 달러가 불법적으로 전용돼, 니카라과 좌파 정부에 대항하는 반군을 지원하는 데 쓰인 사실도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레이건의 국가안보보좌관 존 포인덱스터가 사임했으며 국가안보회의 사무국 직원이었던 올리버 노스 중령은 해임됐다.

포인덱스터와 노스는 의회에서 위증하고 조사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레이건의 후임자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은 이란-콘트라 스캔들 관련자 6명을 사면했다.

레이건은 무기 판매 대금이 자신도 모르게 니카라과 반군에게 흘러들어갔다고 주장했다.

◇ 리처드 닉슨

닉슨은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의회에서 탄핵소추안 통과가 확실시되자 1974년 8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 스캔들의 이름은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의 전국위원회 본부가 있던 '워터게이트 빌딩'에서 온 것이다. 단순 절도범을 가장한 침입자가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했고, 닉슨 행정부가 이를 사주했다는 의혹과 은폐 의혹이 제기됐다.

이 사건으로 7명이 기소돼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중 2명은 전직 백악관 보좌관이었다. 피고인 중 5명은 유죄를 스스로 시인했으며 나머지 2명은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침입 의혹이 처음 제기된 후 몇 달간은 닉슨에게 큰 타격이 없었고, 그는 1972년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1974년 하원 법사위는 사법방해, 권력남용, 의회모독 등 3개 조항의 탄핵안을 통과시켰으며, 이에 대한 표결이 하원 전체회의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닉슨은 하원 전체회의의 탄핵소추안 표결이 실시되기 직전에 사임했다.

당시 닉슨이 연방수사국(FBI)에 워터게이트 수사를 중단토록 압박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테이프가 공개된 것을 계기로 집권 공화당의 핵심 인사들이 닉슨에 등을 돌렸고, 이 때문에 표결이 예정대로 이뤄질 경우 탄핵소추안 통과가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따른 형사범죄 기소는 면했다. 닉슨이 부통령으로 임명한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1개월 후에 닉슨에 대해 사면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 율리시스 그랜트

그랜트 대통령은 오랜 친구인 최측근 유력 인사가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난처함을 겪었다.

현대의 '백악관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직위인 '대통령 개인비서'를 맡았던 오빌 배브콕이 '위스키 링'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기소됐기 때문이다.

1875년 벤저민 브리스토 재무장관이 개시한 조사를 계기로 증류업자 등이 공범들과 짜고 당시 화폐로 수백만 달러의 주세를 빼돌린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과 관련해 수백명이 체포됐으며, 배브콕도 공모자로 기소됐다.

검찰은 배브콕이 사건 주모자들에게 보낸 전보를 발견했다고 말했으나 그랜트 대통령은 배브콕을 위해 증언하겠다고 나섰다.

그랜트 대통령이 측근인 배브콕을 위해 법정 증언대에 서서 신문에 응하는 모양새를 피하기 위해, 1876년 2월 12일 백악관에서 이뤄진 그랜트 대통령의 법정외 선서 증언이 이뤄졌다.

신문 내용과 증언 내용은 글로 기록돼 나중에 세인트루이스 소재 법정에서 낭독됐으며, 이를 들은 배심원단은 배브콕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앤드루 존슨

앤드루 존슨은 사상 처음으로 탄핵된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재건' 과정에서 의회와 심한 마찰을 겪다가 탄핵됐다.

테네시 출신인 존슨은 민주당 출신이었으나, 1864년 공화당 출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이는 거국 정권을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1865년 링컨이 암살된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은 남부연합 지도자들을 사면하자고 주장하면서 해방된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데 반대했으며, 이 때문에 공화당 의원들이 격분했다.

이런 상태에서 존슨이 에드윈 스탠턴 전쟁부 장관을 해임하면서 의회와 대통령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고, 이 해임조치가 불법적이라는 내용의 탄핵소추안 의결로 이어졌다.

링컨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스탠턴 장관은 패배한 남부연합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존슨에 대한 탄핵 재판은 1868년 3월 5일 상원에서 시작됐다. 탄핵 재판은 2개월여 후 단 1표 차이로 파면안 부결로 끝나, 존슨은 대통령 임기를 채울 수 있었다. 다만 1868년 대통령후보 지명을 위한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패배함에 따라 연임 기회는 갖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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