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급작스런 무력 충돌 발발에 공관원도 대사관 복귀 못해

UAE "한국민이 곧 우리 국민" 이동 협조…고양이·개도 수송기에

(서울=연합뉴스) 김효정 오수진 기자 = "'이드 알피트르'(라마단 종료를 기념하는 사흘간의 명절) 72시간을 놓치면 기회의 창이 닫힐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반드시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드 마지막 날인 23일을 (탈출) 데드라인으로 봤다."

'프라미스'(Promise)로 명명된 이번 수단 교민 탈출 작전은 최악의 조건 속에서 진행됐다고 외교부 당국자가 25일 전했다.

그는 정부가 그동안 여러 차례 교민을 대피시켰지만, 이번이 가장 어려운 상황으로 꼽을 만큼 여건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군벌 간 충돌이 이처럼 심각한 교전으로 전개될지 국제사회도 예상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격전지가 우리 공관과 교민들 거주지와 너무 가까웠던 탓이다.

생명을 위협받는 순간 속에서도 교민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정부 지침에 따라 신속하게 외부로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프라미스 작전 과정에서는 정부가 다져온 우방국과의 협력 체계가 빛을 발했다. 아랍에미리트(UAE)를 비롯해 최근 우리 정부가 긴급 구호대를 파견한 튀르키예, 프랑스 등 여러 나라가 우리와 함께 이동할 수 있다는 의사를 먼저 전달해 오기도 했다.

◇ 모가디슈 때보다 어려운 최고 난도 위급상황…교민 집결 '난관'

군벌 간 무력 충돌이 발발한 지난 15일(현지시간), 휴일을 맞은 여러 교민과 공관 직원들은 집과 직장을 벗어나 외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관저에 머물던 남궁환 주수단한국대사는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해 대사관으로 급히 들어왔으나 해외 출장 중이던 영사는 아예 수단 내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딸, 모친과 함께 시장에 간 참사관은 시장에서 고립돼 인근에 있는 이탈리아 비정부기구(NGO) 쉼터에 간신히 몸을 피한 상황이었다.

다른 외교부 당국자는 "공관원이 고립되고 교민들은 모두 흩어져 있는 상태에서 이분들을 한곳에 모으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남궁 대사는 대사관이 격전지와 가까운 하르툼 국제공항 인근이라 위험할 수도 있지만 교민들을 대사관에 모으기로 했다. 비교적 비상 물자가 넉넉히 준비돼 있고 위성 전화와 무전기도 갖춘 데다가 함께 머무를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교민 결집과 탈출까지, 21일부터 23일까지인 '이드 알피트르' 기간에 이뤄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드에 무슬림들은 친지를 방문하거나 음식을 나눠 먹는 풍습이 있어 교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교민 결집을 시작한 첫날인 21일에는 공관 직원들부터 대사관에 입성했다. 대사관 현지인 행정직원이 차량을 이용해서 실어 날랐다.

그러나 다음날, 이 직원이 극심한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교민을 데리러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남궁 대사가 직접 교민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서 대사관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23일 새벽 김밥으로 이른 아침 식사를 한 남궁 대사와 교민들은 UAE 측이 공지한 출발 장소로 무사히 이동했고, 그곳에서 6대의 대형 버스에 탑승, UAE 호송대와 함께 포트수단 국제공항까지 1천174㎞를 쉬지 않고 달렸다.

교민들이 탑승한 버스에는 UAE뿐 아니라 일본, 말레이시아 등 여러 나라 국민 200∼300명이 함께 탔다.

약 33시간의 이동 끝에 교민들은 포트수단 국제공항에 도착했고, 먼저 도착한 외교부 신속대응팀의 도움을 받아 공군 수송기 C-130J '슈퍼 허큘리스'에 탑승했다. 불과 45분 만에 모두 몸을 옮겨 싣자 수송기는 곧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외교부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교민들이 정부의 철수 방침에 따라줬고 대사관이 제시한 탈출 경로에도 신뢰를 보내준 덕분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처음에는 한두명 정도 의견을 달리하는 분도 있었지만 다 같이 나가야 한다는 결정을 따라주셨다"며 감사를 표했다.

정부의 빠른 탈출 결정과 기관 간 유기적인 협조, 국민의 신뢰 속에 교민 28명은 24일 무사히 제다 공항에 도착했다. 키우던 고양이 2마리와 개 1마리도 함께 수단 탈출에 성공했다.

◇ 수단 철수작전은 외교전 종합판…호송대 꾸린 UAE "한국민이 우리 국민"

'프라미스' 작전 수행에서는 한국과 UAE가 쌓아 온 우호관계가 진가를 발휘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과 압둘라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외교·국제협력부 장관의 지난 21일 통화 직후 UAE 측에서 육로로 이동하는 방안을 먼저 제안해 온 것이다.

터키와 프랑스 등 여러 국가가 같이 이동하는 방안을 제안했는데 정부는 검토 끝에 UAE 주도 호송대 합류를 결정했다. UAE 대사관에서 제공한 차량이 호송대를 에스코트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육로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UAE를 믿고 가게 된 것"이라며 "UAE가 현장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정보의 질이 정확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사태를 헤쳐나오면서 어려울 때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가 드러난다는 말이 생각났다"며 "UAE와의 우정을 다시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박 장관은 압둘라 UAE 장관과 두 차례 통화하고, 칼둔 알 무바라크 아부다비 행정청장과는 지속해서 SNS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칼둔 청장은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며 "한국민이 곧 우리 국민"(Your people are our people)이라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함께 이동한 일본 국민들이 집결지를 찾지 못하자 우리 측에서 기사를 보내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박 장관은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하야시 외무상과 기시다 총리 등은 우리 측에 인사를 보내온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 당국자는 "팬데믹 때도 아프리카에서 일본과 함께 (교민 철수용) 비행기를 많이 띄웠다"며 "이번에 협력이 빛을 발했는데 '외교전의 종합판'이었다고 평가한다"고 말했다.

kik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