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50㎏ 총알과 포탄 두른채 ‘투시롤<카라멜 사탕>’ 먹으며 버틴 ‘열흘간의 악몽’

[한국전 숨은영웅/89세 노병 빌 치즈홈씨의 아픈 기억]

올해는 1953년 7월 27일 맺어진 6·25 전쟁 정전협정이 70주년을 맞는 해다. 한국전 당시 미국을 포함해 전세계 22개국 196만명의 젊은이들이 유엔의 깃발아래 참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이들이 피흘려 싸우며 지켜낸 동맹의 가치와 정신이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룬 토양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특파원들이 각국 참전용사들을 직접 찾아가 생생한 전투 기억과 소회를 들어보고 발전한 한국을 바라보는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연합뉴스의 기획 리포트를 연재한다.


영하40도 혹한 속 개미처럼 밀려오는 중공군과 사투
절반 이상 전사, 죽은 전우들 트럭 실어 눈물의 철수

16세 때 나이속여 자원 입대, 3개월만에 한국전 투입
제대후 PTSD 겪다 용기내 2019년 70년만에 한 방문

치즈홈 씨의 자택에 걸려 있는 장진호 전투 그림. 

1934년 5월 캘리포니아주 스톡턴에서 태어난 빌 치즈홈(89) 씨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군에 자원입대했다. 당시에는 18세 이전에는 입대가 되지 않던 때였다.

그는 "(아버지의 이혼으로) 계모와 함께 살기 싫어서 집에서 나가고 싶었고 그래서 나이를 속여 입대했다"고 했다.

군인이 되고 채 3개월여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입대 6개월 만에 한국 땅을 밟게 됐다.

듣도 보도 못했던 나라인 한국에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은 한층 격렬해졌고, 자신이 속한 7보병사단 31연대는 장진호에 배치 명령을 받았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 미 제1해병사단 1만5천여 명이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몰렸다가 혹한 속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한 전투다. 한국 전쟁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전쟁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1950년 9월 당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기세를 잡은 유엔군은 통일할 의도로 북한 지역으로 빠르게 진격해 나갔으나, 장진호에서 중공군을 맞닥뜨렸다.

유엔군은 중공군과 사투를 벌이다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몰렸고,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모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공군을 맞닥뜨리기 전 이미 전쟁은 날씨부터 시작됐다. 100년 만에 왔다는 혹독한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날씨는 예상한 것 그 이상이었다.

추위에 대비한 장비는 소용이 없었다. 공격에 대비해 엄호(구덩이)부터 파야 했지만, 땅이 꽁꽁 얼어붙어 그럴 수도 없었다.

미군은 M1 소총은 물론, 바주카포, 포탄이 1㎞ 이상 날아가는 무반동총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최전선에 있었던 치즈홈 씨는 "나는 몸 전체에 총알과 포탄을 두르고 있었다. 그 무게만 50㎏는 족히 됐다"고 했다.

당시 최신 장비를 동원한 공격에 수많은 중공군이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중공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팔과 경적을 불어대며 끊임없이 내려왔다.

"저 멀리서 보이는 중공군은 마치 개미 같았다. 그들은 죽은 시체를 밟고 내려왔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가늠도 되지 않았다. "우리보다 10배, 15배는 되는 것 같았다"고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치열한 전투는 계속됐다. 장진호에 도착하자마자 3박 4일간은 한숨도 자지 못할 정도였다. 추위는 계속돼 죽은 중공군의 옷을 벗겨 껴입어야 했다.

▶“우린 결코 후퇴하진 않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혹독한 추위에 식량도 모두 꽁꽁 얼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캐러멜 사탕인) 투시롤(Tootsie Roll)만 먹고 7∼10일 가량"을 버텼다.

투시롤은 장진호 전투 당시 혹한에 얼어붙은 식량 대신 비상 보급 식량으로 활용됐던 것으로 유명하다. 적에게 포위됐던 미 해병대가 후방 보급부대에 박격포탄을 보내 달라는 통신을 보냈는데, 이를 접한 후방 부대에서 투시롤이 해병 대원들 사이에서 박격포탄을 일컫는 은어인 줄 모르고 진짜 투시롤 사탕을 공수해 투하한 데 따른 것이다.

치즈홈씨는 "전투 중 일본에 있던 지원 부대에 박격포를 보내 달라고 했다. 박격포의 코드명이 '투시 롤'이었다. 근데 그 부대에서 잘못 알아들어서 박격포가 아닌 진짜 투시 롤 수십통을 보내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먹은 투시 롤은 '생명줄'이었다. 그는 그 기억을 잊지 못해 지금도 재킷 호주머니에 투시 롤을 넣고 다닌다고 했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까. 밀려드는 중공군 행렬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추위는 계속되면서 미군은 결국 '후퇴'를 결정했다.

그는 "1951년 9월쯤 미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1년 가까이 한국에 있으면서 5번 가량 전투를 했다"며 "장진호 전투가 최악이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포탄 잔해에 맞아 다리를 다치기도 하고 네이팜탄에 시력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고 했다. 입대 후 알게 된 친구도 이 전투에서 잃었다.

그는 "내 품에서 친구를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다"며 "자신도 아빠가 됐다며 아기 사진을 보여준 지 불과 며칠 뒤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많은 병사가 전투로, 추위로 사망했다”며 "당시 육군이 2천500명가량 됐는데, 절반 이상이 살아 돌아가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죽은 동료들을 트럭에 태워 흥남까지 내려왔다. 수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도 이때 피난을 했다. 이는 흥남 부두에서 10만명이 남한으로 피난한 철수로 이어졌다.

치즈홈씨는 "우린 결코 후퇴하지 않았다. 다른 방향으로 전진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웃어 보였다. 이는 올리브 스미스 당시 미 1 해병사단장이 장진호 전투에서 철수하자 "후퇴인가요"라는 기자 질문에 말하면서 유명해진 어록이다.

▶전쟁서 일어선 한국, 참전 보람

1953년 군 생활을 마친 후 한국 전쟁 참전 공로로 2개의 훈장을 포함해 모두 7개의 메달을 받았다.

치즈홈씨에게 한국 전쟁은 오랫동안 끔찍한 기억(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으로 남았다. 한국이 발전했다고 들었지만,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 2019년에서야 한국에 가보겠다는 용기가 생겼고, 마침내 약 70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그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 가난했던 나라가 스스로 일어서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한국전 참전에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집 현관에 놓인 '장진호 명판’

美 해병대로부터 받은 참전 인증  "오로지 충성"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남쪽으로 1시간가량 떨어진 주도 세일럼. 시내에서는 꽤 떨어진 모로우 코트 노스웨스트라는 길로 들어서자 입구에 지붕에서 성조기가 펄럭이는 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금세 참전 용사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관 입구 한켠에는'북한 1950년 11월 27일∼12월 11일'의 기간과 함께 '초신 해병대(CHOSIN MARINE)'라고 적힌 작은 명판이 놓여 있었다.

한국 전쟁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던 '장진호 전투'(Chosin Few) 참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전 당시 미군은 일본이 제작한 지도를 사용해 '장진'을 '초신(Chosin)'으로 불렀다.

명판은 훗날 장진호 전투 주력이었던 미 해병대로부터 받은 참전 인증이다. 미 해병대의 유명한 구호로, '언제나 충성'(Always Faithful)을 뜻하는 라틴어 '셈퍼 파이(Semper Fi)'가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