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 수준으로 영어 구사하는 3세대 번역가 그룹 맹활약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황석영(81)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가 21일(현지시간) 영국 인터내셔널 부커상 시상식에서 아쉽게 고배를 들었다. 그러나 한국문학은 영국 최고권위 문학상인 부커상에서 3년 연속으로 최종후보(숏리스트)에 오른 성과를 올렸다.

한국 작가의 작품이 인터내셔널 부커상의 최종 후보에 오른 것은 '철도원 삼대'가 통산 5번째다.

2016년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인터내셔널 부커상의 전신인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한국 작가 최초로 수상한 데 이어, 2018년 그의 다른 소설 '흰'이 최종후보에 또다시 올랐다. 이어 2022년 정보라의 SF·호러 소설집 '저주토끼', 지난해엔 천명관의 장편소설 '고래'가 최종후보에 올랐다가 고배를 들었다.

인터내셔널 부커상은 영어로 번역된 비영어 문학작품에 주는 부커상의 한 부문이다.

부커상은 보통 노벨문학상과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힐 만큼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다. 따라서 최종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영국과 호주,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영어권은 물론 비(非)영어권 유럽 출판계와 독자들의 주목도 받게 돼 작가와 해당 작품이 매우 큰 홍보 효과를 누린다.

이번에 최종 문턱에서 고배를 마신 황석영은 또 다른 장편 '해질 무렵'(영어판 'At Dusk')으로 2019년에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의 1차 후보(롱리스트)에 오른 적이 있어 이번이 두 번째 부커상 도전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오랜 시간 한국문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해 온 '이야기꾼' 황석영이 내놓은 선 굵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기대를 모았다.

'철도원 삼대'는 근현대사 100년 동안 세상을 움직인 주역이었으나 그 역할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한국의 산업노동자들을 주연으로 내세워 마음껏 이야기를 펼쳐낸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다. 한국 근현대 노동·독립운동사라는 밑바탕에 민담적 요소를 가미하고, 때로는 환상적 리얼리즘 기법으로 풀어낸 점이 국내외에서 호평받았다.

부커상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부당해고에 항의해 공장 굴뚝 위에서 시위하는 이진오라는 인물의 렌즈를 통해 일제강점과 해방이라는 복잡한 민족사의 이야기를 노동계급의 정치적 투쟁 서사와 결합해 보여준다"며 "서구에서 보기 힘든, 한국에 관한 포괄적이고도 총체적인 작품"이라 평가했다.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철도원 삼대'까지 지금껏 통산 다섯 작품이, 그것도 내리 3년을 잇달아 인터내셔널 부커상의 최종후보에 오른 데에는 작가 개개인의 문학적 역량 외에도 번역의 질이 꾸준히 높아진 것이 큰 몫을 했다.

이번에 '철도원 삼대'를 영어로 옮긴 두 번역가 가운데 김소라(소라 김 러셀) 번역가는 '황석영 전문가'로 불릴 만큼 그의 작품들을 다수 영어권에 소개해온 베테랑으로 꼽힌다. 2019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1차 후보(롱리스트)에 올랐던 황석영의 또다른 장편 '해질 무렵'(영어판 'At Dusk')도 그가 번역했다.

김 번역가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영어와 한국어의 이중언어 환경에서 성장했다. 특히 그는 번역의 '도착어'인 영어가 모국어인 화자로, '출발어'(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고 이를 도착어로 표현하는데 능숙해 한국문학의 영어 번역에 가장 적합한 자질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문학 번역에 뛰어든지 올해로 15년째인 그는 그동안 신경숙, 공지영, 배수아, 김보영, 황석영, 편혜영 등의 소설들을 영어권에 꾸준히 소개하는 한편,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과 한국문학번역원 산하 번역 아카데미 등에 출강하며 후배 번역가 양성에도 힘을 쏟아왔다.

이번에 김소라 번역가와 함께 '철도원 삼대'를 공역한 배영재 번역가는 반대로 한국어가 모국어라서 둘은 서로를 받쳐주면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배 번역가는 한국문학번역원 산하 번역 아카데미에서 김 번역가의 클래스에 참여하며 처음 연을 맺은 '사제' 관계이기도 하다.

김소라 번역가는 영국인 데버러 스미스(한강 '채식주의자' 번역)를 비롯해 허정범(안톤 허. 정보라 '저주토끼' 번역), 김지영(천명관 '고래' 번역) 등 최근 들어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는 이른바 '3세대' 한국문학 번역가 그룹에 속한다.

한국문학의 외국어, 특히 영어 번역은 외국 유학을 다녀온 대학 교수 그룹인 1세대와, 한국어를 학습한 외국인 교수와 공동작업을 하는 2세대 번역가들에 이어 도착어인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면서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3세대 번역가로 진화하고 있다.

부커상에서의 연이은 성과 외에도 김혜순의 시집 '날개 환상통'(영어판 'Phantom Pain Wings'. 최돈미 번역)이 지난 3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어워즈) 시 부문을 한국 최초로 수상하고, 지난해 11월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불어판 'Impossibles Adieux'. 최경란·피에르 비지우 번역)가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받는 등 주요국 문학상들이 한국 작품을 호명하는 경우가 있따르고 있다.

이렇게 한국문학이 주요 문학상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서 한국문학에 대한 해외 독자와 평단, 출판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이것이 다시 문학상에서의 성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구축되고 있다.

한국문학의 내적 역량과 자산이 계속 축적되는 가운데, 정부와 민간의 체계적인 번역 지원이 더해지면서 어느덧 '문학 한류'가 안정적인 성장기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은 "문학은 한 사회와 집단, 시대를 가장 온전히 담은 장르이지만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다른 문화로 확산한다"며 "민관이 여러 걸림돌을 극복하고 지난 30여 년간 일관되게 문학 번역가들을 지원·양성해온 것이 2~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부커상 같은 해외 주요 문학상에서 최종후보에 계속 오르는 것은 물론 실제 수상까지 연결시키려면 3세대 번역가들을 더욱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양성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곽 원장은 "(한국문학의 세계화 물결에) 지금 엄청난 물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라면서 "향후 수년간 이런 흐름에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다음 단계를 밟느냐가 이른바 K-문학, K-컬처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yongla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