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변화에 연중화·대형화 흐름 뚜렷…전문가 "전국 어디든 발생 가능"
'지형·기상·연료' 3요소 결합 시 속수무책…"위험 증가" 비관 전망도
기후변화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갈수록 산림을 위협하는 가운데 '산불 연중화·대형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일상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동시다발적인 산불로 인해 지난 26일 오후 4시를 기준으로 사망자 24명, 중상자 12명, 경상자 14명의 인명피해가 난 것으로 잠정 파악됐다.
보금자리와 일터는 물론 문화유산 등이 화마(火魔)에 잿더미가 되는 등 시설물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경북 북동부권 산불 하나만 봐도 지자체들이 보는 피해 추정 지역은 3만㏊ 이상이다. 여의도 면적(290㏊)의 103배, 축구장 면적(0.714㏊)의 4만2천16배가 넘는 지역이 피해를 봤을 것으로 보인다.
역대 가장 피해 규모가 컸던 산불은 강원 강릉·동해·삼척·고성 등을 초토화시키며 피해 지역이 2만3천913ha에 달했던 2000년 4월 산불이었는데, 이를 훌쩍 뛰어넘어 역대 최악의 산불로 기록되게 됐다.
전문가들은 대형산불 확산에 영향을 미치는 '지형·기상(기후)·연료(수종)'라는 산불 확산 3요소를 모두 갖춘 탓에 그야말로 역대급 피해를 발생시켰다고 분석했다.
◇ '아까시꽃 피면 끝' 옛말…"이러다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번진다"
강원 동해안에는 '아까시꽃 피는 5월 이후엔 산불이 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벚꽃이 필 때를 산불 발생 위험시기로, 아까시꽃이 필 때를 나무들이 물을 머금어 수분 함량이 많아지고 녹음이 짙어지는 5월 이후에는 산불 위험이 사라지는 시기로 본다는 데서 유래한 속설이다.
하지만 최근 산불 발생 추이를 보면 속설이 깨지고 있다.
산림청이 산불 추이를 분석한 결과 1980년대 연평균 238건 발생하던 산불이 2020년대(2020∼2023년) 들어 연평균 580건 발생하고 있다.
산불 피해 면적은 1980년대 연평균 1천112ha에서 2020년대 연평균 8천369ha로 대폭 넓어졌다.
2024년까지 최근 10년간 봄·가을철 산불조심기간 외에도 산불 발생 비율이 28.3%로 높았고, 산불 발생 일수도 2000년 136일→2010년대 143일→2020년 161일로 증가 추세다.
산불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연중화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병두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2002년 충남 청양·예산에서 대형산불이 발생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전국 어디서든 대형산불이 발생할 수 있다. 이제는 '서해안에서 불이 나서 동해안까지 번질 수도 있다'는 말도 나온다"고 말했다.
◇ 양간지풍 맞먹는 강풍에 도깨비불 난무한 산불 현장
이번 산불은 '지형·기상·연료'라는 산불 확산 3요소 모두에 영향을 받았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고동저'(西高東低) 지형적 특성에 더해 '남고북저'의 기압 배치로 인한 강한 서풍이 급속 확산과 대형화의 토대로 작용했다.
서풍은 백두대간을 넘어 하산하면서 온도가 상승하고 지형이 가파른 동쪽은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 분다. 이로 인해 백두대간 동쪽의 기온은 크게 오르고 대기가 순식간에 건조해진다.
산불 확산 3요소 중 '바람'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데, 봄철 강원 동해안에서 부는 태풍급 강풍인 '양간지풍'과 같은 서풍이 불면서 불똥이 날아가 새로운 산불을 만드는 '비화'(飛火) 현상을 일으키며 삽시간에 확산했다.
일명 '도깨비불'로 불리는 비화 현상은 이번 산불 현장에서도 그 위력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국립산림과학원의 실험 결과 바람이 없을 때는 30도의 경사면에서 산불이 분당 0.57m의 느린 속도로 확산했지만, 바람이 초속 6m로 불면 바람이 없을 때보다 무려 26배나 산불 확산 속도가 빨라졌다.
게다가 낮 기온마저 평년보다 10도 이상 높은 20도 안팎의 초여름 날씨를 보이면서 산불의 연료인 낙엽의 수분 함량이 10% 이하로 떨어져 불이 붙기도, 확산하기도 쉬웠다.
채희문 강원대 산림환경보호학전공 교수는 "기후적인 요건 중에서도 바람(서풍)이 대형산불의 첫 번째 원인"이라며 "산불은 주불을 얼마나 빨리 효과적으로 진압하느냐에 따라 대형산불 확산 여부가 결정되는데, 비화 현상으로 인해 큰 불길이 여러 개가 형성되며 피해를 키웠다"고 짚었다.
◇ 진화 도울 단비 내리지만…봄철 산불 위험 지속 전망
다행히 27일 비 소식이 있어 산불 진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봄철 산불 위험은 여전히 크다.
4월도 예년보다 비가 적게 내릴 확률이 커 산불 위험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상청 최신 3개월 전망에 따르면 4월 강수량은 평년(70.3∼99.3㎜)보다 적을 확률과 비슷할 확률이 각각 40%, 많을 확률이 20%로 추산됐다.
문제는 당장에 직면한 상황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도 어둡다는 점이다.
국립산림과학원이 앞으로 기후변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분석·예측한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통해 내다본 우리나라의 산불 위험성과 관련한 전망을 보면 모든 기후변화 시나리오에서 산불 발생 건수와 대형산불 위험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후변화에 따른 산불위험지수는 기온이 1.5도 상승 시 8.6%, 2.0도 상승 시 13.5% 증가하는 것으로 예측됐다.
또 다른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의한 산불 발생 위험도 역시 중미래(2040∼2070년)에는 30∼100%, 21세기 말(2071∼2100년)에는 47∼158%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2022년 2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따른 산불 위험성 분석 결과 산불 발생 건수가 2030년까지 14%, 2050년까지 30%, 2100년까지 50%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전국종합=연합뉴스)
(변지철 김상연 심민규 천정인 권준우 박영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