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정전의 한때
김준철


깜박이던 기억은 눈을 감고
어둠의 수면 위에
간신히 떠 올라있다

먼지처럼 숨 쉬는, 하나의
시대를 지나
시대가 가진 모든 경계를 지우고 있다

그곳에선 볼 수 없기에
언제나
벽을 앞에 두고 있어도
은밀히 버려지고 있던
포마의 머리들…
상실의 꼬리들…

정전이 되었을 때
살아있음으로 멀리서
깜박여야 하는 밤

나의 호흡은
그곳과 단절된 채
수면 위, 그들을 응시한다


  며칠 전, 달라스 지인이 카톡으로 그곳 소식과 함께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그중 하나는 집 앞 나무 사진이었다. 비가 내리던 중 기온이 급하강하니 나무 전체가 급속냉동된 모습이었는데,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수정고드름의 모습이 그야말로 환상적인 정취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절박했다. 전기가 끊기고 히터도 안 나와서 온 식구가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스타벅스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창가 자리에서 따스한 햇살을 쪼이면서 고양이 마냥 노곤하고 맹한 눈빛으로 한나절을 보냈다. 비행기로 세 시간여면 갈 수 있는 달라스는 원터 스톰으로 인해 겨울왕국이 되었는데, 내가 사는 곳은 달력상으로 겨울임에도 에어컨을 틀고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여름왕국인 것이다.
  물론 두 시간의 시차가 있긴 하지만, 같은 땅 위에서 누군가는 햇살을 쬐며 책을 읽고 그 시간 누군가는 어쩌지 못하는 재난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일순간 과연 우리는 자연재해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그런 종류의 상상 혹은 현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구촌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그 지리적, 물리적 거리가 점차 더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든다. 쥐었던 주먹에 힘이 풀리는 순간이다. 
  첫 시집에 상재 했던 ‘벽’ 시리즈 중 몇 편을 소개하려고 한다. 악다구니 쓰며 분주하게, 때로는 분노하며 한껏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그저 불어오고 밀려오는 바람에 순응하며 내려놓는 작업도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