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1년 앞 '깜짝 손님'에 시민들 "美 지지 보여주러 온 것"

미카엘 대성당 앞 북적…"역사적 장면, 푸틴 열받았을 것" 한껏 고무

(서울=연합뉴스) 김동호 기자 = "독립 이후 오늘만큼 키이우 거리의 오랜 교통체증이 반가웠던 적이 없었어요."

전쟁 발발 1년을 불과 나흘 앞둔 20일(현지시간) 오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라는 뜻밖의 손님을 맞이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공습경보와 미군 정찰기 출현, 교통 통제 등으로 도심에 일순 삼엄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는 했지만, 시민들 사이에 불편해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1년간 전쟁의 고통과 겨울의 맹추위를 겪으며 지쳐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위로받은 듯,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와 활기가 가득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와 영국 가디언은 이날 예고없이 전쟁 지역을 찾아온 귀한 방문객으로 한껏 들떠있는 키이우 분위기를 전했다.

차를 몰다가 꽉 막힌 도로에 한참을 갇혀있었다는 비즈니스 컨설턴트 세르히 코쉬만(41)은 "숱한 고난과 트라우마를 겪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며 바이든 대통령 방문을 반겼다.

그는 꼭 1년 전 스마트폰으로 전쟁 기사를 읽을 때만 해도 키이우가 며칠 내로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 체념했다고 한다.

세르히는 이날 바이든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키이우에서 만나 껴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NYT 기자에게 보여주며 "기뻐서 울고 말았다"며 "어떤 심리적인 희열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의 '깜짝 방문'이 공식 발표되기에 앞서 키이우 시민들은 소셜미디어에서 혹시 '중요 인물'이 오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쏟아냈다고 한다고 NYT는 설명했다.

이른 시각부터 느닷없는 도심 봉쇄와 바리케이드 설치, 미국대사관 앞 경비 증강 등으로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실제 일부 언론은 이날 오전 우크라이나 외무부를 인용해 '서방의 주요 파트너가 방문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양국 정상이 키이우 중심부의 성 미카엘 대성당에 들어갔다 나올 때 돌연 공습 사이렌이 울리며 일순 긴장감이 고조되기도 했지만, 시민들은 늘상 겪는 일인 듯 괘념치 않는 표정이었다.

먼발치에서라도 바이든 대통령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미카엘 대성당 앞 광장까지 달려온 안드리 리트빈(20)은 가디언 취재진에 "아무도 그가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며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리트빈은 "이건 역사의 한 장면이고, 러시아가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주민 페요도르 코날렌코는 "바이든은 미국이 우리를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러 온 것"이라며 "푸틴이 분명히 열받았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우리 곁에 크고 강력한 나라가 함께 있다는 것은 푸틴이 더이상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며 "전쟁 초반 우리가 질 것만 같이 보였던 것도 바뀌었고, 이제는 우크라이나가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핵과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올렉산드르 루딕(87)도 바이든 대통령을 보러 성당 앞으로 급히 뛰어나왔지만, 때를 맞추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루딕은 "2000년 빌 클린턴이 왔을 때는 사진도 찍었다"며 "바이든에게 감사하다. 미국의 도움으로 우리는 러시아를 쫓아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키이우 도심 광장과 마찬가지로 인터넷 공간도 기쁨과 환호로 가득 찼다.

우크라이나 네티즌들은 전쟁을 지지하는 친러시아 성향의 블로거들에게 "왜 슬픈 표정을 하고 있어?"라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d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