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장례식서 모인 전·현직 대통령, 분열된 정치 뒤로하고 존중과 화합의 순간
■미국이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법
극과 극 오바마-트럼프
지난 9일 워싱턴DC 국립대성당. 지미 카터 전 대통령 국가 장례식에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버락 오바마, 조지 W 부시, 빌 클린턴 등 전현직 대통령 5명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비록 미국 역시 보수(공화)와 진보(민주)로 나뉘어 절대 화합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전쟁을 벌이고 있으나 이날 장례식 현장엔 이념도 없고 정치도 없었다.
이날 TV카메라엔 트럼프 당선자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포착됐다. 트럼프는 과거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출생 음모론'을 제기하며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오바마도 트럼프에 대해 치를 떨었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를 '민주주의의 위협이자 적'으로 몰아붙이고 경합주를 다니며 민주당 후보의 당선을 위한 캠페인에 열을 올렸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모습은 다른 나라에선 이해하기 쉽지않은 장면이었다. 특히 생전에 카터를 '최악의 대통령'이라 비판한 트럼프도 민주당을 상징하는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가 대중의 관심을 끄는 행사에서 푸른 정장에 빨간 넥타이라는 그의 상징적인 유니폼을 포기한 건 사소한 일이 아니다"고 했다.
전현직 대통령들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와 경쟁했다가 분패한 해리스 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트럼프 지지층 의사에 반한 행동을 했다가 트럼프와 척을 진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도 앞뒤에 모여 앉았다.
이를 두고 "분열된 미국에서 보기 드문 통합의 순간"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날 장례식에선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공화당)이 생전에 미리 써둔 추도사를 그의 아들이 대독했다. 포드 전 대통령은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카터 전 대통령과 승부를 겨룬 '정치적 숙적' 관계였지만, 정치 현역에서 은퇴한 뒤엔 두 사람이 당파를 초월한 우정을 보여줬다. 2006년 12월 포드 전 대통령이 타계했을 땐 카터 전 대통령이 추도사를 하기도 했다. 당시 당적이 다른 두 전직 대통령의 끈끈한 우정은 최근 극심하게 분열된 미국 정치의 당파를 넘어서는 관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치적으론 경쟁자였지만 퇴임후엔 친구로 지낸 두 전직 대통령은 생전에 서로의 추도사를 미리 써놓았다.
배우인 포드의 아들 스티브 포드는 "아버지가 인생의 '황혼기'에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한 추도사를 작성했다"고 했다며 그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포드는 이 추도사에서 "이제 지미가 저보다 10년은 더 오래 살 것 같으니(실제는 훨씬 더 살았다), 저는 제 추억을 아들에게 맡겨두려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짧은 기간 라이벌이었지만 우린 오랜 우정으로 이어졌다"며 "우리는 공유한 가치가 있었기에, 서로를 경쟁 상대로 인정했음에도 친애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포드는 유머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미 당신이 내 신경을 건드린 적 없다고는 말 못하네. 그러나 정치하는 사람 중 상대의 신경을 안 건드리는 사람이 있던가"
이 대목에선 전현직 대통령 들 뿐만 아니라 모든 조문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카터 전 대통령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바이든 대통령도 이날 카터 전 대통령 생전 요청에 따라 추도사를 했다. 그는 자신이 1976년 대선에 출마한 카터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유로 '변하지 않는 인격'을 꼽으며 "카터와의 우정을 통해 훌륭한 인격은 직함이나 권력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증오를 받아들이지 않고 가장 큰 죄악인 권력 남용에 맞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 발언을 하는 순간 장례식을 중계하는 카메라가 자리에 앉아 있는 전직 대통령들을 비췄다.
바로 전날까지만해도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막말을 서슴치 않았던 민주?공화 양 진영의 전현직 대통령등이었지만 이날 만큼은 서로를 향했던 평소의 독기 어린 비방은 없었다.
미 언론은 "극도로 분열된 미국 정치에서 목격된 이례적 화합의 모습"이라고 했다. 한 매체는 "민주·공화 양 진영의 전직 대통령들이 한마음이 돼 떠나는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품위를 보여줬다" "세상을 뜬 카터가 살아 있는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