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신분 숨기고 사는 이민자들 당장 추방될까 '전전긍긍'
어릴 때 부모 따라와 오바마 정부때 체류 허가된 DACA 청년들도 긴장
LA 한인타운 '단속대원 급습' 소문에 일부 종업원 종적 감추기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 정부의 대대적인 불법이민 단속에 미국 내 한인사회와 이민자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모처에 사는 50대 여성 A씨는 30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20년 넘게 미국에서 교통법규 잘 지키면서 조심해서 살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요즘은 정말 너무 불안해서 잠도 잘 못 자겠다"며 "최대한 숨죽이며 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자신이 사는 곳과 이름을 절대 쓰지 말아 달라면서 인터뷰에 응한 A씨는 2004년 관광비자로 미국에 온 뒤 합법적인 체류 신분을 얻지 못한 채 21년간 불법 이민자로 살아왔다.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어서 남편, 딸과 함께 미국에 왔다는 그는 관광비자가 만료된 뒤 유학비자를 취득하는 방안을 고민하다가 그 비용을 부담할 경제적인 형편이 안 돼 포기했다.
미국에서 사는 데 필수적인 운전면허증은 당시 신분에 상관없이 발급됐던 시애틀에서 따 왔고, 행여나 교통법규 위반으로 경찰 단속에 걸렸다가 신분이 들통날까 봐 항상 법규를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A씨 부부는 일용직이나 식당 종업원, 아이를 봐주는 베이비시터 등 합법 신분이 없어도 되는 '캐시 잡'(cash job)만 구해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A씨는 "여기서 살면서 법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다"며 "택스 아이디(개인 납세자 식별번호)를 발급받아서 세금도 꼬박꼬박 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나중에 사면을 받는다든지 그런 제도가 있을 때 우리가 세금을 내면서 살았다는 것이 플러스 요인이 되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A씨 부부는 미국에서 살면서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은 출생과 동시에 시민권을 얻었다.
A씨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5세 때 미국에 와 현재 27세인 딸의 앞날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딸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불법 체류 신분이었다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시행된 '불법체류 청년 추방 유예'(DACA) 제도로 합법적인 신분을 얻었다.
DACA는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미국에 왔다가 합법 체류 신분을 취득하지 못한 이들이 추방을 면하고 취업을 할 수 있게 한 제도로, 2012년부터 시작됐고 이후 2년마다 자격을 갱신하게 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1기 행정부 때 이 제도를 없애려고 했으며, 현재 공화당이 정부를 장악한 주(州)들이 소송을 제기해 존폐의 갈림길에 있는 상황이다.
A씨는 "딸도 요즘 정말 불안해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DACA를 없애버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많이 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주변에 (불법) 신분 얘기를 안 하고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하는 것도 힘들고, 그저 속앓이만 하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 이민국 통계에 따르면 2023년 3월 말 기준 미국 내 DACA 신분 체류자는 57만8천680명이고, 이 가운데 출생지가 한국인 사람은 5천320명이다.
한인·아시아계 이민자를 지원하는 단체인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의 한영운 오거나이징 디렉터는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핫라인(전화)을 운영 중인데, 최근 문의 전화가 정말 많아졌다"며 "우선 걱정된다고 전화하는 분들이 많고, 신분을 증명하려면 어떤 서류를 들고 다녀야 하는지, 혹시 검문받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을 많이 물어본다"고 전했다.
또 "서류 미비자를 고용한 한인 업주들도 불안감 때문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문의하는 전화가 여러 건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인 중에는 아직 추방 위기에 몰렸다는 사례가 없었지만, DACA 신분이 아닌 서류 미비 이민자가 이 단체 핫라인에 전화해서 얘기하던 도중에 전화가 갑자기 끊긴 사례도 몇 차례 있었다고 한다. 한 디렉터는 "안타깝지만, 그분들은 아마도 체포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NAKASEC은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자신의 권리 알기'(Know Your Rights)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불법 이민자 체포·단속을 벌이고 있는 미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집에 찾아오더라도 집 안에서는 절대 문을 열지 말고 영장이 있는지, 판사가 서명했는지 등을 먼저 확인하라고 안내한다.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아시아계 지원 비영리단체 AJSOCAL(Asian Americans Advancing Justice Southern California)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단체의 한국인 상담원은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뒤로 시민권 취득에 관한 문의가 굉장히 많다"며 "전에는 주로 미국에 온 지 몇 년 안 되는 분들이 영주권 취득 이후에 시민권을 따려고 문의했는데, 요즘엔 1970∼80년대에 미국에 와서 50년 넘게 거주한 분들도 갑자기 시민권을 따고 싶다고 얘기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영주권은 계속 갱신해야 하고, 그 사이에 본의 아니게 범법자가 되면 추방당할 수 있으니까 영주권을 가진 분들도 불안해하면서 시민권을 따려고 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LA 한인타운도 뒤숭숭한 분위기다. 남미계 불법 체류자들을 적잖게 고용하는 한인 마트와 식당 등 업주들은 종업원들이 갑자기 체포돼 영업에 타격이 있을까 봐 우려하고 있다.
지난 28일에는 LA 한인타운 인근에서 ICE의 단속이 이뤄지면서 자체 커뮤니티를 통해 이 소식을 들은 불법 체류자들이 일하던 가게에서 일제히 도주해 종적을 감췄다는 얘기도 돌았다.
LA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김용호 남가주한인외식업연합회 회장은 "단속이 시작된 지 아직 1주일 정도밖에 안 돼서 우리 회원들 업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었다"며 "하지만 종업원들 중에는 체류 신분이 없는 경우도 꽤 있기 때문에 많이들 걱정은 하고 있다"고 전했다.
LA 시내에서 남미계 불법 체류자들이 일용직을 구하러 주로 찾아오는 곳인 홈디포 매장 앞에는 이날 오전 10시께 기자가 방문했을 때 평소보다 적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짐 나르는 일이나 주택 공사와 관련된 일을 구해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은 기자가 다가가 말을 걸자 구인 요청인 줄 알고 한꺼번에 주위로 모여들었다가 불법 이민자 단속에 대한 질문을 하자 경계하는 얼굴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안토니란 이름의 젊은 남성은 어릴 때 멕시코에서 부모를 따라 미국에 왔고, 여전히 영주권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는 주변에서 ICE에 체포당한 사례가 있느냐고 묻자 "아직 주변에서는 못 들었고, 어제 인스타그램을 통해 LA 동부 쪽에 ICE가 나타났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답했다.
ICE의 단속이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당연히 두렵다"면서도 "하지만 돈을 벌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불안해도 매일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저 집과 일터를 왔다 갔다 할 뿐인데, 불안하다는 이유로 이런 일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지난 23일부터 ICE의 엑스(X·옛 트위터) 계정에 게시된 내용에 따르면 ICE와 협력기관은 29일까지 1주일 동안 불법 이민자 단속을 벌여 총 5천537명을 체포했고 4천333명을 구금했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임미나 특파원 mi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