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경중'(安美經中)은 안보 지원은 미국에서 받으면서도 중국과 경제 공조를 탄탄히 유지한다는 대한민국의 비공식 대외 기조로 알려져 왔다. 미국과 중국의 사이가 좋던 시절 이런 기조는 우리나라 성장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미·중 관계가 대립 구도로 전환하면서부터 미국은 안미경중 기조에 거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이 거부감은 노골적 경고음으로 강화했다. 미국과 중국 간 헤게모니 쟁탈전이 한창인 상황에서 아시아, 유럽 등에 있는 주요 동맹국들의 안미경중 기조는 기회주의적 태도라는 인식을 보인 것이다. 미국 편인지, 중국 편인지 정체를 확실히 하라는 압박이었다. 지난 5월 말 싱가포르 아시아안보대화에서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이 내놓은 메시지는 그 결정판으로 읽혔다.
당시 헤그세스 장관은 "많은 나라가 중국과 경제 협력, 미국과 방위 협력을 동시에 하려는 유혹을 받는 것으로 안다"면서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은 중국의 해로운 영향력을 심화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일본 등 주요 동맹국 대표들을 면전에서 직설적으로 압박한 것이다. 외교적 화법으로 돌려 말하지 않은 건 마지막 경고로 비치게 할 의도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동맹과 파트너들이 (중국에) 종속되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중국은 물론 동맹국에 대해서도 현상 변화가 없을 경우에 대비한 '행동계획'을 마련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 정가에선 혈맹인 한국이 이 문제와 관련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의구심을 내비쳐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부 측근과 비선에서는 이 대통령을 친중반미 성향으로 평가한 주장을 전달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를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나 참고했는지는 모른다. 이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긴장감과 우려가 조금씩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우리 고위 관리들이 회담 사전 조율을 위해 먼저 미국을 급히 방문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숙청·혁명' 발언까지 나오자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실제 공개 회담은 탈 없이 마무리됐다.
이처럼 심상찮은 분위기 속에서 이 대통령이 방미 회담을 계기로 안미경중 기조를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견해를 분명히 밝힌 장면은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워싱턴DC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 한 연설에서 우리나라가 안미경중 기조를 취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과거처럼 이 같은 태도를 취할 수는 없는 상태가 됐다"고 말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한국도 미국의 기본적인 정책에서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고도 했다. 미국 측에선 이를 안미경중 기조의 폐기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국가 원수가 직접 현지에 날아가 상대국 우려를 직접 불식했으니 대미 관계에서 새 정부가 첫 단추를 잘 끼웠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은 게 사실이다. 미국과 중국 모두 우리 정부가 향후 실제로 보여줄 행보를 주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 열강 사이에 낀 한반도의 오랜 숙명이기도 하다. 중국이 앞으로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도 관심이 쏠려 있다. 중국은 지난 2016년 한미 양국이 한반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결정하자 우리나라를 상대로 경제 보복을 하며 직접적 압박을 가한 적 있다. 갈수록 회색 지대가 좁아지는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 정책 결정자들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lesli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