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에 "동의했으면 탄핵" 이어 "금융위기 올 것"…"美 요구 과도" 여론전

동맹 현대화 논의 속 '자주 국방' 메시지도…'협상 지렛대' 해석

'3단계 비핵화론' 북미대화 추동…北 대화 끌어내며 활동공간 찾기 과제

미국과의 관세협상 세부 협의가 난항을 겪으며 장기화하는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이 연일 외신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요구조건이 지나치다는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외신 채널을 활용해 국제사회를 향해 '미국 요구가 공정하지 않다'는 여론전을 벌이면서 조금이라도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겠다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은 22일 보도된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3천500억달러를 인출해 전액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공개된 미국 시사잡지 타임 인터뷰에선 "(미국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면 탄핵당했을 것"이라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한 메시지다.

미국은 한국 정부와 지난 7월 상호 관세 15%와 3천500억달러(약 488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합의한 뒤 이 중 현금 직접 투자 비중을 높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원/달러 환율 급등을 우려해 통화 스와프 체결을 미국에 제안했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해 이후 협상이 교착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이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강력한 표현을 쓰며 미국의 요구가 과도하다는 점을 부각한 데에는 한국 측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해 협상의 교착 상태를 풀어보려는 생각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통령 탄핵이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은 한국 국민에겐 상징적인 사건들로, 이를 거론한 것은 그만큼 이 대통령이 협상에 임하는 엄중한 각오를 내비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선 전날 이 대통령은 국방 현대화·전문화를 통한 '스마트 강군'을 강조하며 자주국방 의지를 드러냈다.

이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외국 군대가 없으면 자주국방이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일각의 굴종적 사고(가 문제)"라며 "우리는 외부의 군사 충돌에 휘말려도 안 되고 우리의 안보가 위협받아서도 안 된다"고 썼다.

이 대통령이 이전에도 여러 차례 강조한 내용이지만 한미 양국이 관세·안보 영역을 넘나들며 '총괄적 협상'을 하는 가운데 게시된 글이란 점에서 주목받았다.

미국은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한국에 '동맹 현대화'를 한층 거세게 요구하고 있다.

주한미군을 현행 주둔군에서 역내 안정을 위한 기동군으로 재편해 '전략적 유연성'을 제고하고 한국의 국방비를 증액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한국은 동맹 현대화 기조에는 공감하되 '한국의 역할 확대'에 초점을 맞추고 이으며, 주한미군을 축소해 대북 방위 태세가 약화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갖고서 협상에 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자주 국방 메시지를 낸 것은 '한국의 자체적인 국방력 강화가 중요하다'는 정부의 확고한 입장을 다시 한번 밝히는 동시에 안보 협상에서도 수세적으로만 임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관세협상과 마찬가지로 미국과의 협의에 있어 "할 말은 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전체 협상에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도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이 대통령은 최근의 연이은 외신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중단-축소-비핵화'로 이어지는 '3단계 비핵화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하며 한반도 평화를 위한 북미 대화에 힘을 실었다.

이 대통령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3단계 중 첫 단계인 '북핵 동결'이 "실행 가능하고 현실적인 대안"이라며,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당분간 핵무기 생산을 동결하기로 합의한다면 이를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앞선 타임 인터뷰에서도 북한이 개발 중단 조치를 한다면 "일부에 대해 보상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미국이 '피스메이커'로 나서면 한국이 '페이스메이커'로 북미 대화 중심의 프로세스에 보폭을 맞추겠다는 이 대통령의 구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때마침 김 위원장이 미국이 북한 비핵화 목표를 포기하면 북미대화를 할 수 있다고 피력하면서 이 대통령의 이 같은 구상이 북미대화 물꼬를 트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대통령실 내부에서 감지된다.

다만 북한이 이 대통령의 '단계적 비핵화론'을 비판한 점은 반갑지 않은 대목이다.

김 위원장은 전날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이 대통령의 3단계론을 "우리의 무장해제를 꿈꾸던 전임자들의 숙제장에서 옮겨 베껴온 복사판"이라며 '비핵화 포기'를 북미 대화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자칫 북미대화가 진행되더라도 한국 정부나 이 대통령의 활동 공간이 지나치게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이 대통령으로서는 비핵화 목표를 유지하면서도 북한을 북미대화의 협상장으로 끌어낼 묘수를 찾는 동시에 한미 간 대북정책을 더 정교하게 조율해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 셈이다.

(서울=연합뉴스) 황윤기 기자 wate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