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아동병원 "재앙 닥쳤다"…수술 직후 어린이 대피조차 막막

"병원 못오는 아이들 집에서 죽어간다" 호소…의료진 출퇴근도 난항

(서울=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아침에 지하 대피소에서 눈뜨자마자 위층에 있는 중환자실 걱정을 해요. 6살 조카가 호흡기를 떼면 안 돼서 아직도 위층에 있거든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아동 병원에서 병마와 싸우기에도 벅찬 어린이 환자들에게 러시아 침공이라는 재앙까지 닥쳤다고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일 보도했다.

이 병원은 한해 2만명을 돌보는 키예프 최대 아동 병원으로, 지난달 24일 러시아 침공 이후 지하에 임시 대피소를 만들어놓고 환자와 보호자를 수용 중이다.

지하 대피소에 있는 한 여성은 포화 속에서도 지상층 중환자실에 남아있어야 하는 조카 걱정에 발만 동동 구르는 처지라고 WSJ에 말했다.

이 조카는 올해 초 뇌종양 수술을 받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치료를 받는 중이어서 지하로 대피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여성은 "아침에 눈을 뜨면 밤사이 중환자실이 폭격을 받지는 않았는지부터 생각한다"면서 "조카는 위층에서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우리는 여기서 목숨을 지켜야 하는 처지"라고 말했다.

이 병원 외벽에는 총탄을 맞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저항에 주춤했던 러시아군이 주말 사이 화력을 증대해 키예프 등 주요 도시에 포격을 퍼부으면서 병원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포화 속에서도 환자를 돌봐오던 의료진은 대중교통이 일부 마비되고 시내 지하철역이 대피소로 쓰이면서 당장 출퇴근을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막막해졌다.

고육지책으로 일부는 조를 짜서 자가용 합승을 시작했고, 일부는 출퇴근을 포기한 채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 중이라고 한다.

한 외과 의사는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가장 큰 비극은 병원에 접근조차 못 한 채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이들이다.

이 병원에서는 맹장 수술을 받는 어린이가 하루 평균 10명 정도였는데, 러시아 침공 이후에는 하루 한 명 밖에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 관계자는 "이런 아이들이 병원에 오지 못해 집에서 죽어가고 있다"면서 "전쟁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는 인도적 재앙이 닥쳤다. 세계가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면서 다른 것은 많이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우리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까스로 수술을 받았다고 해도 지하 대피소에서는 제대로 회복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한 신생아는 선천적 장애로 20차례 수술을 받자마자 지난달 24일부터 지하 대피소로 옮겨야 했다.

이 아기의 아빠는 "장남은 군에 입대해 싸우고 있고, 아내는 고향에서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면서 "나도 전쟁터에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지만 지금은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8살 소년은 뇌종양 수술 후 자립으로 걷기 위한 물리치료가 시급한 상황인데도 지하 대피소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다고 WSJ은 전했다.

이 소년의 엄마는 "경악스럽다"면서 "저들이 우리에게 이런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우리가 저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나"라며 분노를 터트렸다.

newglas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