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 떨어져 인파 휩쓸린 청년 토목기사…광주 조선대병원에 빈소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토목과 졸업생이면 꿈의 직장으로 여기는 회사에 들어갔어요. '취업 턱' 낸다며 동창들을 만난 것 같아요."

31일 광주 조선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아들의 빈소를 차린 아버지는 "든든한 기둥 같은 장남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들 김모(28)씨는 이틀 전 '이태원 참사'에서 유명을 달리한 청년 중 한 명이다.

동행한 친구는 신발 한 짝을 잃고 무릎에 찰과상만 입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인파에 휩쓸린 김씨는 참사 현장에서 주검으로 수습됐다.

가족들은 뉴스로 처음 이태원 소식을 접했을 때 평소 북적이는 번화가를 좋아하지 않았던 김씨와는 상관없는 사고일 것이라고 여겼다.

오후 11시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걸었던 전화가 신호음만 울리고 끊기기를 반복하자 가족들은 밤을 꼬박 지새웠다.

수십번 시도 만에 사고 이튿날 오전 6시께 첫 통화가 이뤄졌다.

전화를 받은 경찰관은 '사고 현장에서 습득한 휴대전화가 서울 용산서에 있다'고 안내했다.

김씨의 부모는 친지들과 함께 한달음에 서울로 향했다.

한남동주민센터 실종자 접수처에서 김씨의 행방을 찾지 못한 부모는 인원을 나눠 사망자들이 안치된 병원으로 흩어졌다.

참사 현장에서 멀지 않은 대학병원 영안실에서 김씨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김씨는 잠을 자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아무리 불러도 눈을 뜨지 않았다.

전남 목포가 고향인 김씨는 광주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하고 토목공학 학사학위까지 받았다.

지방 합격률이 15%에 불과하다는 토목기사 자격증을 2년 전 따낸 김씨는 최종 목표로 삼았던 회사에 들어가고자 2년을 더 준비했다.

올해 8월 취업에 성공한 김씨는 서울로 이사해 건설 현장 감리자로 일했다.

객지 근황을 큰아버지, 이모, 사촌에게도 수시로 전할 만큼 살갑고 다정했다.

가족들은 김씨가 토목기사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서울에 빈소를 차리려 했다.

마지막으로 고향 산천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사촌들의 설득에 빈소는 이날 오전 광주로 옮겨졌다.

한 유가족은 이날 빈소를 찾아온 기자들에게 "앞선 세대가 청년 후세대를 지키지 못했다. 방심이 빚어낸 비극"이라고 심경을 전했다.

이날 광주지역 장례식장에는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다른 청년들의 빈소도 마련됐다.

간호사의 꿈을 이루고자 늦깎이 대학생이 돼, 함께 방을 구해 살던 동기생과 이태원 거리를 찾았다가 희생된 사연 등도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참사 셋째 날인 이날까지 광주시는 시민, 연고자, 거주자 등 6명이 숨진 것으로 파악했다.

h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