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 9참전용사 92세 노병 딕 카터씨…"죽을만큼 무섭고 두려웠지만 후회 없어"

[특별기획/ '숨은 영웅']


올해는 1953년 7월 27일 맺어진 6·25 전쟁 정전협정이 70주년을 맞는 해다. 한국전 당시 미국을 포함해 전세계 22개국 196만명의 젊은이들이 유엔의 깃발아래 참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이들이 피흘려 싸우며 지켜낸 동맹의 가치와 정신이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룬 토양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특파원들이 각국 참전용사들을 직접 찾아가 생생한 전투 기억과 소회를 들어보고 발전한 한국을 바라보는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연합뉴스의 기획 리포트를 연재한다.<편집자주>


영하 40도 혹한 중공군과 대치속 잠과의 싸움
유엔군 7천명 동상 사망…"살아돌아온게 기적"

해병대 박격포수로 참전, 장진호서 19세 생일
"진흙투성이였던 한국, 아름답게 발전 큰 보람"

뇌졸중을 겪은 딕 카터(92)씨는 70여년 전 기억을 끄집어내는 데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장진호의 매서운 추위만큼은 여전히 온몸으로 느끼는 듯했다.
메릴랜드주 자택에서 만난 그는 장진호 전투를 설명할 때마다 "너무 추웠다. 그런 추위는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6·25전쟁 격전지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12월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벌어졌다.
중공군 12만명에 포위된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등 유엔군 3만명이 수적 열세에도 중공군에 큰 타격을 입히며 남쪽으로 철수했다.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 속에 유엔군 사상자 1만8천명이 발생했는데 그중 7천명은 전투가 아닌 동상 피해였다.

카터씨는 "너무 많은 이들이 얼어 죽었다. 난 발가락에 동상이 걸렸고 다행히 발톱이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예쁘지 않다. 내 손에도 온 곳에 상처가 있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눈이 내리면 6ft(약 180cm)씩 쌓였다"면서 "코트를 입었지만 너무 추웠고 등짝에서 얼어붙었다. 등에 멘 (배낭 속) 전투식량도 얼었고 언 채로 먹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들어가서 쉴 곳이 없고 항상 밖에 있었는데 많은 이들이 잠들면서 죽었다. 죽기 편한 방식이라고 이야기들을 했다. 나도 자긴 했지만 가능한 한 짧게 잤다. (얼지 않도록) 일어나서 손가락을 움직여야 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자퇴후 16세 입대

1931년 12월 18일 출생인 카터씨는 지금 사는 헤이거스타운에서 10명의 형제를 둔 대가족에서 자랐다.
16세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군인이 되고자 했으나 나이를 들켰고 1949년 육군에 입대했다.

버지니아주 포트 마이어스에 배치됐던 그는 "가능한 한 세계를 많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한국행을 자원했다. 카터 일병은 1950년 8월 19일 육군 2사단 23연대 소총수로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내가 입대하자 아빠가 엄청 화를 냈고 엄마는 더 화를 냈다. 한국에 가자 엄마는 더욱더 화를 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들어본 적도 없었다. 배에 타고 나서야 한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배에서 내리고 바로 다음 날부터 (전장에서) 싸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장진호에서 카터씨는 해병 1사단과 함께 배치돼 박격포수를 맡았다.

그는 두 팔을 어깨너비 정도로 벌리면서 "이만한 포탄을 발사했는데 한번 쏘면 16명에서 20명까지 죽이고 그 숫자만큼 더 다치게 할 수 있었다. 하루 5, 6번 포격 임무를 받았다"고 말했다.
중공군이 코앞까지 다가온 탓에 박격포를 중공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수류탄으로 망가뜨리고 다급히 후퇴한 적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매일 죽음을 마주하며 너무 무서웠지만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용기를 찾게 된다. 적이 처음 공격하는 순간 스스로 용기를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인은) 참 훌륭한 사람들이고 난 그때 죽을 만큼 두려웠지만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사 제대, 21년간 GM 근무

중공군의 포위망을 힘겹게 뚫은 카터씨의 부대는 걸어서 원주까지 철수했다.
정신 없이 싸우다 보니 어느새 장진호에서 19번째 생일이 지나갔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졌고 1951년 2월에는 경기도 양평군에서 벌어진 지평리 전투에서 싸웠다.
그는 전쟁 중 기억나는 한국인이 있느냐는 질문에 부대원들을 따른 한 고아를 떠올렸다.
"8살이나 9살이었을 텐데 부모가 죽었다. 전투 중 우리한테 왔는데 먹고 자고 모든 것을 우리랑 같이했다. 우리는 그에게 집이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도 부대와 있었다"고 말했다.

카터씨는 1951년 8월 한국 복무를 마치고 귀국했고, 동갑인 메리씨와 결혼해 오는 11월이면 72주년을 맞는다.
치매를 앓는 메리씨는 몸이 불편해 누워있는 상태에서도 남편이 인터뷰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자가 질문하는 내내 목을 들어 남편을 봤다.
카터씨는 1952년 하사로 육군에서 명예 제대했으며 GM 자동차공장에서 21년을 일했다.
군을 사랑한 그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주방위군과 예비군으로 활동했다.

▶"내 인생에서 뭔가를 했다"

형제 6명이 군 복무를 했으며 동생 한명은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뒤 고엽제 후유증으로 곧 숨졌다고 그는 말했다.
현재 아들과 딸, 6명의 손주, 9명의 증손을 뒀으며 모두 메릴랜드주와 인근 버지니아주에 산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기억이 생생했을 때 만든 자료를 들고 인터뷰를 보조한 손녀 첼시씨는 "우리 가족 모두 할아버지가 매우 자랑스럽다. 그는 우리에게 국가에 대한 사랑과 미국의 가치,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카터씨는 전쟁 이후 한 번도 한국에 가지 못했다. 비행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는 "기회가 있었지만, 난 비행기 타는 게 싫다. 우리는 전쟁에서 적군 비행기 몇 대를 격추했고, 우리 비행기도 몇 대가 격추돼 불탔는데 난 그냥 하늘에 있는 게 싫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이 발전한 모습을 사진으로 봤다면서 "지금은 아름답고 큰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때는 진흙투성이인 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서 뭔가를 했다는 기분이 든다. 좋은 기분이다. 나 자신 말고 다른 이들의 삶을 도와줬다고 느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