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시대 정(鄭)나라는 남쪽의 초(楚)와 북쪽의 진(晉) 사이에 낀 소국이었다. 강한 쪽에 기대 살아남으려는 줄타기 외교가 유일한 생존수단이었다. 초나라가 세를 떨치면 초에 붙고, 진나라가 기세등등하면 진에 붙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터는 늘 정나라 땅이었고, 백성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정나라는 결국 두 강대국의 신뢰를 잃었다. 릫줄을 잘 서면 산다릮라는 말은 허상이었다.
2천 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 본질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은 춘추시대보다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영토가 아닌 관세·자원·기술·금융의 다차원 전면전이다. 이 틈바구니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나라가 점점 늘고 있다. 문제는 냉전 때처럼 한쪽에 줄을 선다고 안전이 보장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미·중 양국은 노골적으로 한국에 "누구 편이냐"라고 묻고 있다. 미국은 안보를, 중국은 경제를 무기로 내민다. 미국은 한국을 상대로 현금성 대미 투자 3천500억 달러를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자국의 국가 안보와 발전 이익을 침해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한화오션의 미국 자회사 5곳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냉엄한 국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상대가 필요로 하는 히든카드를 갖고 있어야 한다.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희토류, 제조기술력을 무기로 내세우고 있다. 일본은 소재·부품·장비의 경쟁력과 엔화의 안전자산 지위를 방패로 삼고 있다. 한국도 반도체, 배터리 소재, 초대형 선박 등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구축해야 한다. 내수시장 확대와 공급망 다원화 확보도 과제다. 미·중 양국이 한국 없이는 곤란한 영역을 만드는 것, 그것이 한국이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