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가 드론 공습에 주민들 공포, 전쟁 피로감도…러 에너지시설 공습에 순환정전

번화가 상점은 성탄 준비…시내 호텔, 공습 경보에도 팝 음악은 계속 흘러나와

'조기종전' 공언 트럼프 당선·美 장거리미사일 승인 등 정세 복잡…"도무지 알길이 없다" 혼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1천일을 하루 앞둔 18일(현지시간) 정오께 키이우의 공공 뉴스채널 트루카 키이우는 텔레그램을 통해 두 개의 뉴스를 잇달아 내보냈다.

하나는 전날 키이우를 비롯해 우크라이나 전역을 날아든 미사일 120발과 공격용 무인기(드론) 90기의 구체적인 이동 경로를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탄과 연말 시즌 시내 곳곳에서 열릴 이벤트를 소개하는 뉴스였다.

한눈에 봐도 온도 차가 극명한 두 가지 공지사항이 15분 간격으로 키이우 시민들의 휴대전화에 떴다. 당국은 우크라이나의 심장부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경계심과 평정심을 동시에 일깨우려는 것일까.

◇ 공포는 현실…"전쟁 발발 직후와 다르지 않아"

이런 모습을 안전 불감증의 한 단면이라고 치부하기엔 주민들이 느낀 공포는 컸다. 전날 드론에 건물 지붕이 무너진 키이우 시민들의 주거 단지에는 여전히 상흔이 뚜렷했다.

드론이 때린 건물은 5층짜리 구축 아파트였다. 건물 하나만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고층 신축 아파트까지 함께 밀집한 말 그대로의 주거 밀집지 한복판에 드론은 떨어졌다.

이미 외부인의 진입을 차단하는 테이프를 두르고, 지붕 파편과 건물 잔해를 포대에 정리해 놨지만 새벽에 떨어진 드론의 굉음에 주민들은 어쩔 줄 몰랐다.

이름을 할리나라고 소개한 한 노인은 "자다가 벌어진 일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 떨었다"며 "지붕이 부서진 꼭대기 층 주민은 남편이 군인이라 집에 없고 아내만 샤워를 하고 있었다더라"고 전했다.

그는 "이러면 전쟁 발발했던 때와 달라진 게 없다. 이젠 나이 탓에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없는데 밤이 되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무섭다"고 했다.

영하를 오가는 날씨에 빚어진 에너지 대란도 주민들의 공포감을 키웠다.

전날 공습에 에너지 기반 시설이 파괴되면서 키이우시는 이날 순환 정전을 벌이고 있었다. 드론 공습을 받은 아파트 역시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에너지 시설은 반복적인 공습에 노출될 수 있어 시민들의 불안은 더 컸다.

마티아스 슈말레 유엔 주(駐)우크라이나 인도적 조정관은 최근 영상 브리핑에서 "개전 후 우크라이나 전체 에너지 인프라의 65%가 피해를 봤고, 대규모 피란을 유도할 목적으로 공습이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40%는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슈말레 조정관은 덧붙였다.

이미 우크라이나에선 민간인 1만2천여명이 개전 이후 포격 등으로 숨졌고, 전날 공습만 해도 9명의 사망자가 새로 생겼다.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는 게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새로 생기고 있다.

◇ 판이한 일상의 공존…전몰자 친형 "할 말 잃었다"

공포에 짓눌린 드론 공습 지역에서 차량으로 불과 10분 정도 이동해 찾은 키이우 중심가의 모습은 딴판이었다.

쇼핑몰에는 화려한 성탄 장식이 일찌감치 드리워져 있었고, 평일에도 번화가 곳곳이 시민들로 붐볐다.

반면 키이우 내 독립광장에는 전몰자들을 위로하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에는 전사자들의 사진과 수천개의 우크라이나 깃발이 빼곡히 놓여 있다.

지난해 말 동부 도네츠크 전선에서 숨진 동생 레식 디미트로비치 중사를 위로하기 위해 온 제냐(26)씨는 "고향인 남부 니코폴에서 키이우에 올라올 때면 이곳에 온다"며 "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제냐씨는 정부와 시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묻자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다가 "하고 싶은 말을 잃었다"고 답했다.

그는 "아직도 수많은 청년을 숨지게 한 러시아에 분노가 치민다. 끝까지 싸우자고 말하고도 싶다"며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진 건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요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곧 전쟁이 끝난다고 했다가 싸움이 다시 커진다고 했다가 도무지 알 길이 없으니 정부에 할 말도 없고 사람들에게도 내 생각을 말 못 하겠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최근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에 긴장이 고조됐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조속한 종전 주장으로 급격히 협상 분위기에 접어드는 듯했다. 전날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무기 사용을 허용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면은 또 달라졌다.

제냐씨의 말은 좀처럼 가늠하기 어려운 국제 정세 앞에 한 시민으로서 무력하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리고 주변 모두가 이런 복잡한 현실을 은연중에 체감하고 있어서 때로는 공포와 분노를, 한편으론 전쟁 피로감을 품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짐작하게 했다.

키이우를 다니며 바라본 시민들의 판이한 일상은 트루카 키이우가 잇달아 내보낸 드론 경로·성탄 이벤트 뉴스와 닮아 있었다.

순환 정전으로 전기가 한동안 끊긴 유명 의류 상점에서도 손님들은 옷을 골랐고, 호텔에서는 키이우 시내에 공습경보가 울렸다는 안내를 긴급히 내보내면서도 로비에 틀어놓던 팝 음악을 끄지 않았다.

(키이우=연합뉴스) 안희 특파원 prayerahn@yna.co.kr